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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친구를 소개합니다

아침비를 기다리며

by 시쓰남

아침비를 기다리며

25년 10월 22일 오전 7시 06분


비가 오는 아침이길 기대하며 일어났는데 화창하다. 어제저녁에 비가 왔었고 이 비가 계속해서 오기를 바랐었다. 내가 좋아하는 빗소리를 듣는 아침을 기대하며. 이런 나의 바람이 헛된 것이라는 걸 알려주듯 날씨 맑음. 요즘 내리는 비로 인해 아침 공기가 점점 차가워진다. 비와 함께 여름이 떠나갔음을 알리는 것 같다.


비 하니까 어제 문득 떠오르는 일이 있었다. 초등학교 2~3학년쯤 되었을 때 일이다. 하교를 할 때 비가 내렸다. 아침은 맑았기에 대부분 우산은 없었고, 갑작스레 내리는 비에 모두들 당황하고 있었는데 그때 교문 앞에 우산을 쓰고 자녀들을 기다리는 어머니들을 보았다. 엄마와 얼굴이 마주친 아이들은 환한 웃음을 보이며 교문 쪽으로 재빨리 뛰어 나갔고, 잠시 후 하나 둘 작은 우산들이 펴지면서 우산들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이 광경을 구경하다 나도 교문 쪽으로 갔다. 혹시나 엄마가 와 있을까 하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엄마는 아침에 일하러 가신 걸 알았기에. 가능한 비가 좀 잠잠해지면 가려했는데 비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고, 이제 남은 애들도 별로 없고, 처다 보는 사람도 많지 않아 길을 나섰다. 그날 난 지금껏 살아온 동안 그 어느 때 보다 비를 흠뻑 맞으며 걸었던 거 같다. 옷은 말할 것도 없고, 가방, 신발 모든 것이 젖었다. 심지어 가방 속에 책들도 일부 젖었던 걸로 기억을 하지만 그다음에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기억에 없다. 이 일을 기억하며 우산에 대해 글 짓기를 한 적이 있다. 비록 천으로 되어 있고 작지만 소중하다는 내용으로 적었었다. 한편으로 엄마가 마중 나온 친구들의 우산과 비교하며 부러움을 표현하기도 했다.

어제저녁 우리 집 막둥이가 오는 시간 비 예보가 있었다. 그 시간쯤 밖을 보니 어둠 속에서 도로가 비에 젖어 더 까맣게 도드라져 있었다. 어릴 적 생각이 나서 우산을 들고 버스 정류장으로 나갔다. 비가 제법 왔는지 길들이 젖어 있었고, 우산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이 여럿 보였다. 나에게도 2개의 우산이 있었다. 비는 내리지 않아 펼치지는 않았지만 비가 오면 언제든지 펼쳐 보이리라는 마음으로 든든한 우산 2개를 가지고 걸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한참을 기다려도 내가 기다리던 버스가 보이지 않는다. 아이 마중 나가러 갈 때 엘리베이터 생각이 났다.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내릴 때 막 우리 집 층으로 옆의 엘리베이터가 움직였는데 혹시 나랑 길이 어긋난 건가 하는 생각이 계속해서 떠 올랐다. 그 생각이 떠오르자 발길을 집으로 옮겼다. 비 오는 상황을 상상하며 우산을 아이에게 건네는 모습을 상상했는데 이것도 바람대로 되지는 않았다. 비가 오지 않은 건 그 남아 다행이다. 빠른 걸음으로 집에 왔다. 문을 여는데 아이의 신발이 보이지 않는다.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나만 맘이 급해져서 집에 먼저 와 버린 것이다. 집에 와 앉아 있으니 잠시 후 막둥이가 들어왔다. 아빠가 마중을 나갔는데 길이 어긋난 줄 알고 먼저 들어왔다는 자초지종을 설명했지만, 아이에게 별 감정은 없었나 보다. 결과적으로 나는 알지만 아이는 아빠가 진짜 그랬는지 안 그랬는지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만나지 못했으니까.

어릴 적 비가 왔을 때 일화가 생각나서 나도 누군가를 기다려준 엄마처럼 되고 싶은 마음에 정류장에 마중을 나갔었다. 그러나 나의 조급함이 끝내 우산도 펼치지 못하고 집에 혼자 돌아오는 결과를 만들었다. 좀 더 기다릴걸. 다음부터는 더 기다려야겠다. 그래서 꼭 우산을 전달해 주겠다 다짐했다.


우리 집사람은 비 맞는 걸 광적으로 싫어한다. 나는 빗소리도 좋고 비 맞는 것도 그리 나쁘다 생각지는 않지만. 싫은 경우는 아침에 출근할 때 비 맞는 건 제일 싫어한다. 그것도 월요일 아침 새로 세탁한 바지를 입고 나갔을 때 맞이하는 비는 극혐 한다. 킬각이 잡혀 있던 바지가 비로 인해 반듯한 ‘각’을 내려놓고 방금 세탁을 해서 입은 건지 오랫동안 걸친 건지 티도 안 나게 변해 버리기 때문에 아침 출근길에 맞는 비는 질색이다. 다림질한 바지 주름이 이렇게 비해 약 할 줄이야. 바지주름이 사라지면 내 마음에 주름이 생겨 이런 비는 맞는 게 싫었다. 하지만 다른 상황의 비들은 좋아한다. 특히 쉬는 날 조용히 하루 종일 내리는 비는 너무 좋다. 잔잔하고, 조용하고, 계속해서 들려주는 빗소리는 너무 좋다.

고3 때 공부를 도와준다는 기기가 한참 유행이었다. 반에 몇 명의 친구들이 그걸 사용하기도 했는데 가끔 빌려 써보면 계속해서 들려주는 파동 같은 소리가 있었다. 그래서 난 거기서 아이디어를 얻어서 비 오는 날 내 방 창가에서 빗소리를 녹음했다. 그 소리를 들으며 공부를 하고 친구들한테 자랑을 했는데, 한 번은 친구가 이거 빗소리가 아니고 물 흘러가는 소리 아니냐 고 컴플레임을 걸었다. 뭐 빌려 듣는 놈이 요구를 하냐며 다시 내가 들어 보았는데. 빗소리에 빗물 흐르는 소리가 같이 들렸다. 그런데 문제는 흐르는 소리가 더욱 컸다는 점. 내방 옆에 하수도가 있었는데 그때 물이 불어 흐르는 소리가 내 녹음까지 찾아왔었나 보다. 물 흐르는 소리는 지금 들어도 좋은데 그때는 내가 원하는 빗소리에 뭔가 잡음이 들어 같다 생각했는지 친구의 항의를 듣고 그 테이프는 다른 노래들을 녹음하는 모습으로 변경되었다.


위에 글들은 쓰고 보니 난 참 비를 좋아하는 사람 같다. 우산을 쓰게 되면 불편하기도 하지만 우산에서 들리는 빗소리도 듣기 좋다. 비가 오는 날을 좋아라 하지만 이왕이면 바람 없이 비만 내리는 날이 더 좋다. 그래야 우산 쓰고 거리를 걸어도 옷이 젖을 일이 많이 줄어드니까. 이제 겨울이 오면 비보다는 눈이 많이 올 것이다. 다행인 건 이 동네는 눈보다는 비가 더 잦다는 사실. 가끔 눈이 보고 싶으면 군산으로 가면 된다. 여기서는 눈이 조금만 내려도 재난 문자가 비 오듯 전화기에 쏟아진다. 눈에 취약한 동네다 보니 안전사고가 많이 일어남을 염려해서 그럴 것이다.


비가 오는 아침을 기대하며 빗소리에 잔다는 생각에 늦게 일어났는데, 화창한 아침에 놀랬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또 핑계를 대고 있음을 알았기에. 내일부터는 다시 마음을 붙잡고 일찍 일어나서 일과를 시작하겠다. 오늘보다 더 빨리 일어날 것이다. 내일 아침엔 비가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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