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 만의 안녕
견훤이 후백제의 수도로 삼은 곳. 조선 건국을 주도한 이성계의 본관.
이 도시에는 천년의 시간을 거쳐 만들어진 고유한 아우라가 있다.
<걸어보기 전에는 전주를 모른다>
1.
전주에 가기로 했다. 14년 만의 전주. 걷고 싶은 곳이 많아 나만 하루 일찍 여행을 시작하고 금요일 점심 즈음 심이와 춘이 각자의 일정을 끝내고 내려오는 일정이다. 오랜만의 혼영이라 설레는 마음에 며칠간 잠을 설쳤다.
그런데 여행 전날부터 비가 주룩주룩 왔다. 잔뜩 기대한 혼자 여행인데 시작부터 이럴 수가. 들뜨는 마음보다 귀찮음이 커져버렸다. 가장 큰 이유는 전주 날씨였다. 목요일 시작 일요일 마무리인 3박 4일. 토요일을 제외하고 모두 비 소식이 있었다.
꿈꾸던 화창한 전주 하늘과 맑은 한옥마을은 물 건너 간 건가? 비가 오면 혼자라는 자유보다 우울함이 커질 것만 같아서 '그냥 내일 원씨부녀와 함께 갈까?' 고민해 본다. 아직 첫날 혼자 지낼 숙소도 정하지 않았다. 수백 번 고민하다 주섬주섬 짐을 백팩에 넣었다. 그래도 가자.
가장 큰 이유는 도서관 때문이었다. 전주 여행을 준비하다 알게 됐다. 그간 전주는 완벽한 책의 도시로 변모했다는걸. 특히 특성화 도서관이 많았다. 아중 호수에도, 학산 숲속에도, 서학 예술마을에도 아름다운 도서관이 있었다. 심지어 전주 시청 로비도 오롯이 책에 양보했으니 말 다 했지. 마음 가는 독립서점 리스트도 쌓였다. 이렇게나 책에 진심인 도시라니, 무조건 가야 했다. 목적지가 책이 있는 공간이니 날씨에 크게 구애받지 않아도 된다고 스스로를 구슬렸다.
2.
기차가 전주에 다다르자 차창에 빗방울이 맺혔다. 혹시나 기대했는데 역시나 주룩주룩. 우산을 쓰고 전주에서 만날 첫 번째 도서관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전주역에서 도보 7-8분 거리에 위치한 <첫마중길 여행자도서관>. 멀리 빨간 컨테이너가 보이고 여러 번 찾아보며 상상했던 곳이 눈앞에 펼쳐진다. 컨테이너 여러 개를 붙여 만든 첫마중길 여행자 도서관은 두 개의 파트로 나누어져 있다. 1동 여행자 라운지와 2동 아트북 갤러리.
역에서 가까운 위치라는 이유로 관광 안내소처럼 이곳을 대하면 오해가 생긴다. 이곳은 도서관이다. 여행자 라운지에서 독일 아트북 전문 출판사 타센에서 9천 부만 한정 출간한 희귀본 데이비드 호크니의 비거 북을 마주한 뒤 아트북 갤러리에 들어서면 그 사실이 명확해진다. 마블로켓 도시 탐사 매거진 전주편은 첫마중길 여행자도서관을 이렇게 소개했다.
'여행자가 찾는 곳이 아니라 이곳을 찾아오는 누구나 여행자가 되는 곳'이라고. 이 문장이 멋있어서 여러 번 읽는다.
중간 통로를 지나면 270권이 넘는 팝업북, 패브릭 커버북, 일러스트북을 소장하고 있는 아트북 갤러리로 이어진다. 절판본, 사진집, 미술집, 영화, 프리다 칼로에 대해 알아갈 수 있는 특별 코너도 마련되어 있다.
그러다 발견한 사진집 <우연히, 웨스 앤더슨>. 월리 코발이 인기 감독 웨스 앤더슨의 시각적 세계관과 비슷한 사진을 우연히 발견해 영감을 얻어 만든 인스타그램이 이 프로젝트의 시작이다. 동화 같은 색감과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풍경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사진집도 내고 전시회도 진행했다. 가보고 싶었던 전시였는데 놓쳐서 아쉬웠더랬다. 이곳에서 이 사진집을 만난 것이 운명 같은 느낌.
평범한 공간과 일상에 웨스 앤더슨 필터를 입힌 생기발랄한 사진을 한참 들여다본다. 당장 나가서 카메라를 누르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다른 이의 상상력과 시선을 빌린 작품이 이렇게 큰 사랑을 받을 수 있다니 월리코발 본인도 놀라지 않았을까? 웨스 앤더슨은 이 책의 서문을 직접 쓰기도 했다. "이제 나는 우연히 나 자신이 된다는 것이 어떤 건지 이해한다."
다시 여행자 라운지로 넘어와 애정하는 브랜드 매거진 B 시리즈와 잡지 <아는동네 아는전주>를 읽으며 전주와 조금 더 친해진다. 몇 개의 즐겨찾기가 내 지도에 더해졌다. 최갑수 여행 작가의 문장도 카메라에 담았다. '어차피 시간은 지나가고 시간은 우리에게 의미 따위는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경험하고 늙어갈 뿐입니다.' 그저 경험하고 늙어가고 있는 막막한 여행자에게 담담한 위로를 전하는 문장.
다음 시선이 머문 곳은 이곳에서 자체 제작한 귀여운 책갈피다. 자신의 취향으로 꾸밀 수 있도록 다양한 색연필이 준비되어 있다.
책갈피 제일 위에 적힌 '첫마중길'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2017년 정식 개통한 전주역에서 전주 시내로 들어가는 600m 길이의 길. 차가 아닌 보행자가 중심이 되는 거리.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는 도시의 첫인상이다.
길 이름에서 따온 '첫마중길 여행자도서관'은 내가 만난 도서관 중 최고로 따뜻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마중과 배웅에 담긴 마음을 따라갈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으니까. 누군가 집에 도착할 시간이면 문을 살짝 열어두는 엄마를 보며 자랐다. 벌레 들어오면 어떡해,라는 생각으로 문을 바라보던 철없던 나도 이제는 안다. 오는 이를 맞이하고 떠나는 이를 배웅하는 행위에 담긴 귀한 마음을. 춘의 퇴근길, 심이 하굣길에는 웬만하면 버선발로 뛰쳐나가 반긴다. 그런 사람이 있는 공간이 싫을 리 없고 마중과 배웅만 잘나눠도 관계는 단단해진다. 그러니 나는 첫마중길에서 이미 꽤 괜찮은 전주의 환대를 받은 셈이다.
관광지와 떨어져 있어 일부러 가볼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전주역에서 여행을 시작한다면 첫마중길을 걸어보기를 권한다. 웨스 앤더슨이 말한 '우연히 나 자신이 된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게 될지도. 이곳을 통과하며 나는 진짜 여행자가 된 기분이었다.
3.
배가 출출하다면 첫마중길 여행자도서관 근처에 있는 <메르밀진미집>의 땡초소바나 콩국수가 좋은 선택이다. 1960년대 막걸리 전 전문점으로 시작돼 3대째 이어지고 있는 메르밀진미집. 이후 소바와 콩국수가 유명해졌다. 한옥마을에 본점이 있지만 전주역 근처에도 지점이 있어 여행의 깔끔한 첫 끼로 추천할 만하다. 무려 새벽 6시에 영업을 시작한다.
메르밀진미집의 땡초소바와 콩국수 사이에서 고민하다 마음이 콩 쪽으로 더 기울어져 버렸다. 전주 여행의 첫 번째 끼니 콩국수. 나는 40년 동안 콩국수를 먹지 않았다. 그건 마치 밥에 우유를 말아먹는 것처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게다가 그 위에 열무김치를 올려 먹는 건 더 신기한 고문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올해 처음으로 콩국수를 제대로 먹어보고 빠져버렸다. 동네의 서리태 콩국수였는데 정말이지 고소해서 앞으로 하루 한 끼는 콩국수를 먹겠다고 다짐할 정도였다.
낯선 도시 전주에 앉아 혼자 콩국수를 먹으며 생각한다. 인생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60년 전통 메르밀 진미집의 콩국수는 슴슴했다. 제일 맛있었던 건 셀프바에 있던 물김치였다. 이게 전라도의 맛인가... 감탄했던 메르밀진미집의 물김치.
+메르밀진미집에는 보성 말차콩국수와 쑥떡콩국수가 있다. 평이 아주 좋았지만 도전하지 못했다.
+내가 콩국수를 먹고 있을 때 동네 할아버지 그룹이 들어와서 시킨 것은 팥칼국수와 바지락칼국수였다. 현지인 주문에 민감한 편이라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여행자의 도시 전주답게 전주역에서 내리자마자 나를 반긴 것은 '무료 짐배달 서비스'. 전주역 주차장 근처 브라운커피라운지에서 짐을 맡기면 원도심, 한옥마을, 서학예술마을 숙소로 배달해 주는 서비스다. 인당 23kg 이하 수하물 최대 2개를 맡길 수 있다. 다정하기 그지없다. 문의: 063-283-8880
+14년 전 전주 여행 사진전 공모전에 입선한 나의 필름 사진. 청수 약국은 현재 사라졌다.
매일 쓰고 매일 걷는 도시산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