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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봄이 왔다. 계절은 참 다정도 하다. 스님이 가랑잎 밟기가 조심스럽다던 계절도 지났다. 찬 바람 속에서도 햇살이 한 움큼씩 따사로이 비추더니 진짜 봄이다. 봄이면 어김없이 움트는 새싹들로 천지가 기쁘겠지만 우울감이 내 심장 저 어딘가 깊다란 아래서부터 진동하는 나에겐 사계절 중 봄이 가장 잿빛이다. 연둣빛 크레파스로 그려놓은 풋풋한 봄에 세피아 보다는 조금 어두운 필터를 껴 놓은 것 같다면 이해가 쉬울지도 모른다. 봄이 온만큼 나의 무거운 마음도 어느새 부쩍 다가와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노력을 안 한건 아니다.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겨우내 움츠려 있던 생명이 꽃피우는데 일조를 하지 않았나. 하지만 눈에 보이고 정확한 데이터가 있어야 나를 평가한다. 난 숫자를 싫어하는데 말이다. 세간의 평가는 누구를 위한 것일까. 대답은 뻔한데 왜 이목을 신경 쓰며 살아가는지 모르겠다. 알면서도 안 되는 것을 보면 융통성이 없고 고지식한 게 맞나 보다.
농부는 수확이 없는 계절에도 참 바지런히 움직인다. 부모님은 평생 농사를 짓는 농부이다. 수확이 없는 겨울에도 얼마나 부지런하게 움직이시는지 '성실' 하면 떠오르는 대명사는 곧 나의 부모님이다. 싹이 트지 않는 겨울에도 매일 발자국 소리를 들려준다. 거름도 넣어주고 비가 오지 않으니 제 때 물도 뿌려주고 찬 바람이 불 때는 비닐하우스를 따뜻하게 온도 조절도 해 준다. 자식 같은 생명이다. (부모님은 샤인 머스캣, 거봉 포도를 주 업으로 비닐하우스에서 키우신다. 복숭아, 블루베리, 감 등 내가 먹는 것은 내가 키워 먹는다는 철학으로 먹을 만큼의 과실도 텃밭에 일구는 채소도 있다. 오늘도 쑥떡 해 드신다고 쑥을 한 자루 해 오셨다.)
그에 비하면 난 한없이 게으른 자다. 눈앞의 이익에만 따라 움직이는 게으른 도시인이다. 무엇을 심고 가꾸어야 할지 모르겠다. 친구는 아직 적성을 못 찾았다고 하면 변명이라고 꾸지람을 놓는다. 네 나이에 무슨 적성이냐며. 하지만 난 모르겠다. 그 나이 때에 걸맞게 살아가는 가장 평범한 길이 있지만 난 이미 그 길 따윈 서랍에 넣어두었으니 열외 하기로 하고 여전히 적성을 잘 찾아서 백세 인생 잘 살고 싶은 마음이 크다. 뒤늦은 인생도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다만 이 시간을 잘 보내고 싶다. 알게 모르게 스스로를 남들과 비교하느라 놓치는 시간도 많지만 이 시간을 잘 견뎌내고 싶다. 표정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 나무들도 봄이 되니 새싹이 움트질 않았던가. 타인의 시선에는 정체되어 보이는 내 삶도 침묵을 깨고 일어나는 순간이 곧 오리라 믿는다. 그래서 나의 봄도 여느 봄처럼 세피아 장막을 걷어내고 컬러풀했으면 좋겠다.
겉으로 보기에 나무들은 표정을 잃은 채 덤덤히 서 있는 것 같지만, 안으로는 잠시도 창조의 일손을 멈추지 않는다. 땅의 은밀한 말씀에 귀 기울이면서 새봄의 싹을 마련하고 있다. 그러다가 시절 인연이 오면 안으로 다스리던 생명력을 대지 위에 활짝 펼쳐 보일 것이다.
- 겨울 숲 中 -
[맑고 향기롭게. 법정]
법정 스님이 말씀하신 겨울 숲처럼 나 역시도 숲을 이루기 위해 나름의 질서를 유지하며 자라온 식물들처럼 창조의 일손을 놓지 않고 싶다. 따뜻한 햇볕과 이는 바람, 내리는 비에 감사하며 하루하루 성장해 온 성실함을 닮고 싶다. 삶에 대한 나의 성실한 태도가 진심을 담은 결과를 가져오리라 믿는다. 눈 앞의 결과는 늘 멀리 있지만 순수한 마음으로 '오늘'부터 잘 살고 볼 일이다.
[성실]
정성스럽고 참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