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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원 Jun 01. 2020

서른 이후의 삶


 서른이 되기 전에 죽을 줄 알았다. 스물아홉 이후에 삶은 없 줄 알았다. 그러나 2912월 31일 23시 59분 59초를 지날 때. 같이 서른이 될 친구들과 술집에서. 그동안 수없이 했던 얘기를 또 반복하면서. 그렇게 서른을 맞았다. 술자리가 끝나갈수록 모두가 우울해졌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설날이 있다고, 떡국을 먹어야 진짜 서른이라고 한 친구가 말했다. 그래 맞다. 우리는 아직 스물아홉이다. 친구들은  시한부 자기합리화 동의했다. 그렇게 합리화했던 설 연휴가 지나자 진짜 서른이 됐다. 예정에 없던 삼십 대의 시작이었다.


 어릴 적 엄마는 내 인생계획에 대해 자주 말했다. 20살엔 대학 입학. 1학년 마치고 군입대. 스물여섯에 졸업. 이듬해 결혼을 하고, 스물아홉쯤 아이를 갖는 계획. 그러나 이 어설픈 인생계획에서 30대 이후의 계획은 없었다. 당시 그녀 나이가 30대 후반이었으니, 아들의 30대 이후 계획을 말해주기는 어려웠으리라.


 어렸던 나는 엄마가 말한 내 인생계획처럼, 기다리기만 하면 뭔가 확실한 것들이 저절로 이뤄질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저절로 되는 건 없었다. 계획은 이뤄지지 않았다. 자의 반 타의 반, 그녀의 계획을 박살 낸 나는 조금 통쾌하기도 했고 조금 슬프기도 했다. 계획의 허무함과 무계획한 미래 속에서, 나는 30대가 됐지만 20대처럼 여전히 불안했다.




 설 연휴 다음날. 새벽에 전화가 왔다. 새벽에 걸려오는 전화는 항상 좋지 않다. 특히 새벽에 엄마에게서 오는 전화라면 더욱. 나는 핸드폰 진동에 눈을 뜨며 ‘할머니가 돌아가셨구나’ 하고 느꼈다. 엄마는 물기 어린 목소리로 할머니가 돌아가셨으니 장례식장으로 오라고 말했다. 나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씻고 옷을 입고 회사에 연락을 했다. 문을 나서려 할 때. 오늘 미세먼지 농도가 높음을 알려주는 요란한 경보 문자가 왔다. 하얀 마스크를 챙겼다.


 30살이 되며 처음 든 생각은 ‘지겹다’ 였다. 육체적 성장은 예전에 끝났다. 30년 동안 수많은 것을 경험했다. 더 이상 새로울 게 없었다. 늦은 밤 혼자 집으로 들어갈 때. 나는 왜 사는지에 대해 자주 고민했다. 매일 똑같은 일상이 권태롭고 허무했다. 어느 날, 나는 엄마에게 살아가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그녀는 나 때문에 산다고 말했다.




 장례식장에 도착해 사촌들에게 인사하고 엄마를 찾았다. 눈이 퉁퉁 부은 엄마의 얼굴이 안쓰러웠다. 검은 상복을 입어서 그런가 엄마는 평소보다 더 왜소해 보였다. 나는 처음으로 할머니에게 두 번 절을 하고 할머니 곁에 앉았다.


 어색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외할머니와 살았다. 그래서 남들에게 할머니를 소개할 때 빼고, 나는 외할머니를 외할머니라고 불러본 적이 없다. 할머니는 손주 잘 되라고 내가 씻은 목욕물을 항상 꽃밭 줬다. 그런 할머니를 다시 볼 수 없는 게. 지금 그녀의 장례식장에 앉아있다는 게. 너무 어색했다. 할머니를 남에게 소개할 때나 쓰던 외할머니란 단어처럼 어색했다.
 
 꽂아 놓은 향초들이 너무 빨리 타서 자주 갈았다. 싸구려 향초인지 장례식장 천장에 검은 연기가 가득했다. 그날 하늘에 잔뜩 낀 농도 높은 미세먼지 같았다. 상주들과 조문객들은 서로에게 인사하기 바빴다. 그들을 보며 나는 궁금해졌다. 누가 가장 할머니를 사랑했을까? 할머니 없는 할머니의 영정사진 앞에서 고민했지만 답을 알 수 없었다.




 모두 잠든 새벽. 나는 다 타버린 향초를 새 것으로 갈고 떨어진 꽃잎들을 정리하며, 혼자 할머니 곁을 지켰다. 그러다 살짝 졸았다. 잠결에 본 영정사진에는 할머니 얼굴 대신 내 얼굴이 있었다.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다시 본 액자에는 원래대로 할머니의 얼굴이 있었다. 새삼스레 할머니와 내 얼굴이 많이 닮았다는 걸 알았다.


 잠을 깨기 위해 식장에 딸려 있는 주방으로 가 캔커피를 마셨다. 주방 옆, 옷을 갈아입을 수 있게 마련된 쪽방에서 엄마가 쓰러져 자고 있었다. 커피를 들고 쪽방으로 가서 앉았다.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갑자기 할머니 살아 계실 때, 할머니에게 살아가는 이유가 뭐냐고 물어보지 못한 게 아쉬웠다. 엄마가 나 때문에 산다고 그랬던 것처럼. 할머니도 엄마 때문에 살았을까?


 잠든 엄마의 얼굴에는 할머니와 내 얼굴이 반반씩 있었다. 90대였던 할머니. 60대인 엄마. 그리고 30대의 나. 엄마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할머니와 엄마, 그리고 나 사이에 알 수 없는 무언가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발인을 마치고 다음날 출근을 위해 나는 먼저 본가로 갔다. 검은 양복을 벗고 검은 넥타이도 풀었다. 하지만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게 거짓말 같았다. 식탁 위에 할머니 옷들이 곱게 놓여있었다. 태워질 옷들. 나는 태워질 옷의 냄새를 맡다가, 뻔하게 얼굴을 파묻었다. 그제야 실감이 났다. 까만 그을음이 온 얼굴에 묻었다. 코에선 재도 조금 나왔다.


 지하철을 탔다. 한강을 지날 때 지하철 창문에 내 모습이 비쳤다. 창에 비친 내가 꽤 괜찮아 보여서 나는 나와 눈싸움을 했다. 졌다. 신림역 4번 출구로 나왔다. 늦은 오후였지만 미세먼지 때문인지 주위가 어둡고 흐릿했다. 마스크를 꼈다. 손에서 아직 빠지지 않은 향 냄새가 났다. 이틀 밤을 새워서 피곤했지만 기 걷고 싶어 졌다. 도림천 산책로로 발길을 옮겼다.




 산책을 하며 나는 혼자 할머니를 추모했다. 태어날 때부터 나와 함께 해준 천사 같은 그녀. 할머니에게 뭔가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마땅한 재주도, 가진 돈도 없었다. 내가 가지고 있고 또 내게 소중한 게 무엇인지 생각했다. 내 생명 밖에 없었다. 그리고 돌아가신 할머니를 보려면 내가 죽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니 할머니를 추모하는데 내 생명을 쓰는 것이 논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스크를 벗었다. 최대한 깊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다. 그러다 할머니 영정사진 앞에서 고민했지만 알 수 없던 답을 알 수 있었다. 할머니를 그리워하는 사람들 중에, 이 순간 내가 가장 죽음에 가까워지려 노력했다. 이보다 더 확실히 그리워하는 방법을 나는 알지 못했다. 그러므로 미세먼지를 먹으며 산책하던 그때, 그 순간만큼은 내가 할머니를 가장 사랑했다.




 그날 나는 조금 죽었고, 조금 다시 태어난 듯했다. 할머니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마쳤다. 그녀는 엄마를 키웠고, 나를 키웠다. 평생 농사를 지으며 농작물들도 키웠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많이 베풀었다. 할머니가 했던 일을 이제 서른인 내가 해야 할 것이다.

 

 서른 전까지 나는 오직 나만 생각했다. 나는 내가 너무 소중했고 나는 나를 너무 사랑했다. 그러나 이제는 주변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시야를 넓혀 세상을 돌아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매일 같이 찾아오는 권태와 허무를 견딜 수 없을 테니까.


 내 서른 이후의 삶은, 20대의 삶과 다를 것이다. 할머니의 과도 다를 것이다. 많이 달라질 것이라 확신할 순 없으니, ‘조금 달라질’ 삶의 시작이라 해야겠다. 멋진 계획은 없고 여전히 불안하다. 하지만 내게 남은 인생은 살아온 삼십 년 보다 훨씬 길. 그리고 이젠  말고 사랑하고 돌볼 것많아질 테니, 앞으로는 쁘게 지낼 것다. 불안할 틈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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