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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원 Apr 19. 2020

인간관계와 아웃 오브 사이트


 자주 도망쳤다. 적은 재능과 빈번했던 실패. 그리고 많은 우울함 때문에 나는 '인간관계'에서 자주 도망쳤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좋았다. 적게는 한 반에 40여 명. 많게는 한 학년에 400여 명. 게다가 고등학교 때는 야자 때문에 학교에 있는 시간 평균 12시간. 이렇게 오 보고 수도 많은 '친구'라는 인간관계들과 교실, 복도, 화장실, 운동장에서 마주치고, 대화하고, 비언어적 소통을 하는 일들이 피곤했다.

 꼭 소통을 하지 않더라도 피로감을 느낄 때도 있었다. 똑같은 교복을 입은 친구들이 교실에 빽빽이 앉아있는 모습을 볼 때. 또는 그들이 쉬는 시간 복도에서 이리저리 바삐 움직이는 모습을 볼 때면, 나는 왠지 모르게 마음 한 구석이 답답했었다.


 개강이 다가올수록, 대학이라는 새로운 도피처에 대한 나의 기대는 커졌다. 이에 더해 나는 기숙사에 들어가게 됐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의 새 출발. 설렜다. 기분 좋은 도망침이었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내 기분은 나빠졌다. 고등학교와 너무 비슷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대학은 고등학교보다 인간관계의 숫자는 조금 줄고, 나이대가 넓어졌다는 것. 그것뿐이었다.

 이다음부터 겪었던 인간관계는 다 대학이랑 비슷했다. 군대, 아르바이트, 소모임, 회사 등 숫자만 조금씩 차이 날 뿐 관계의 형태는 비슷했다. 그래서 나는 다시 도망쳤고, 다시 우울해졌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절대적인 인간관계의 수는 계속 줄었다는 것이다.




 오프라인 상의 인간관계에 대한 스트레스는 줄었지만, 온라인 인간관계는 또 다른 차원이었다.

 SNS는 간접적이다. 내가 올린 게시물 대한 반응이 있을 때 리액션이나 피드백 정도만 하면 됐다. 보기 싫은 상대라면 상대의 게시물을 뜨지 않게 설정하거나, 정말 싫은 사람이면 쉽게 언팔을 할 수도 있다. 다 싫어지면 SNS 계정을 삭제해버리면 그만이었다.

 카톡이 문제였다. 카톡은 SNS 보다 훨씬 직접적이다. 대화도 1:1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실시간으로 서로가 보낸 카톡 수신 여부 확인이 가능하다. 게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카톡을 이용한다. 이렇다 보니 나만 다른 메신저 앱을 사용하기도 어려웠다.  




 그리고 카톡의 문제점은 더 있었다.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내가 보낸 카톡의 문제와 내가 받은 카톡의 문제.

 먼저 내가 보낸 카톡의 문제. 다른 메신저 프로그램은 보낸 메시지 수정, 삭제가 가능한데 카톡은 이 기능이 없었다. 그래서 '보낸 메시지 삭제' 기능이 나왔을 때 정말 좋았다. 나이가 들었지만 나는 인간관계에 어설펐고, 오프라인/온라인 가릴 것 없이 자주 말실수를 했다. 그런데 이젠 카톡에서 엎지른 말을 주워 담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보낸 메시지 삭제는 메시지 전송 후, 딱 5분 안에만 가능했다. 5분 이후에는 돌이킬 수 없다. 이 이상한 조건은 여전히 불만이지만, 그래도 이 기능이 너무 고마웠다. 인간관계에서 불필요한 후회를 줄여줬다.

 둘째로 내가 받는 카톡의 문제. 상대와 정말 좋은 대화를 이어가다가도, 어느 순간엔 항상 상처 는 카톡을 받았다. 그 순간엔 어찌어찌 참고 넘어가도 남아있는 카톡은 계속 내 기분을 언짢게 했다. 그렇다고 카톡방을 나가자니 좋았던 대화까지 잃는 것 같아 망설여졌다. 하지만 이젠 '상대 메시지 삭제' 기능으로 기분 나쁜 카톡만 선택해 지울 수 있다. 아무리 상처되는 카톡도 지워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러면 나는 기분 나빴던 기억을 잊은 듯이, 상대와 다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크게 위의 두 가지 기능이 카톡에서 가장 좋다. 작게는 1:1 카톡방 티 안 나게 나갈 수 있는 기능. 또 상대 프로필 숨기는 기능도 좋다.

 앞에 나열한 기능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보기 싫은 것을 눈에서 안 보이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아웃 오브 사이트면 아웃 오브 마인드.




 나이를 먹었다. 나이가 들어 좋은 점도 있다. 친구들, 지인들이 예전 강도만큼의 인간관계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 먹고살기 바빠지고, 하나둘 결혼해서 가정이 생겼다. 또 나도 그들도 정신적으로 성숙해졌다. 조금씩 서로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인간관계에 대해서 유연해졌다.

 얼마 전, 오랜만에 가장 친한 친구를 만났다. 여러 이야기가 오가는 중에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10대, 20대 때는 친구들과 어울리려 하지 않는 네 모습이 나와 달라 싫었다. 나는 친구관계를 소중히 하고 많은 시간을 썼는데 너는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니 너는 남 신경 쓰지 않고 현명하게 너의 개성을 지킨 것 같아 부럽다.'

 가장 친한 친구의 분명한 칭찬이었다.  기분이 완전히 좋진 않았다. 내가 말했다.


 '그때도 지금도 나는 친구관계를 소중히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는 못 견뎌서 도망친 거다.'

 내 말을 들은 친구는 그래도 굽히지 않고 말했다.


 '아니 너는 현명하게 너를 지킨 거다. 나는 그럴 자신이 없었다.'

 완강한 친구의 말에 더 대꾸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도망친 거였다. 나도 친구들과 좋은 관계를 갖고 싶었다. 오해지만 그래도 나를 이해하려고 노력한 친구의 마음이 고마웠다. 한편으론 슬펐다. 내가 10대, 20대 때 그토록 친구에게 바랐던, 그 이해를 너무 늦게 해 줬다는 서운함. 가장 친한 친구도 나와는 다른 사람이라는 아주 당연한 무력감. 혹은 내가 가장 친한 친구에게서도 도망쳐, 좋은 관계를 만들지 못한 것이 아닐까 하는 자괴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친구의 오해를 정정해주고 싶어 입을 뗐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여전히 인간관계는 어렵다. 더 나이를 먹어도 어려울 것 같다. 다행인 것은 나는 이제 좀 덜 도망치고 덜 우울해진다. 그리고 온라인 인간관계에서도 나를 보호하는 장치들 잘 사용하게 됐다.

 아웃 오브 사이트면 아웃 오브 마인드다. 내 경험에도 그렇다. 감정도 슬픔도 눈에 안 보이면 없는 거다. 오해도 이해도 중요하지 않다. 나만 눈 돌리면 된다. 인간관계는 할 수 있는 만큼만. 먼저 나를 지키면서. 언젠가 도망치지 않고 우울하지도 않게 되면 그때 인간관계에 노력을 해보겠다. 지금 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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