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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원 Apr 05. 2021

내겐 너무 느끼한 글


 담백한 사람이 되고 싶다. 언젠가 담백한 사람이 되면, 내 글도 담백해질 거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느끼하다는 건 뭘까. 나는 왜 느끼한 것을 피하게 됐을까.   


 느끼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음식에 기름기가 많다.' 이다. 이 의미를 글자 그대로 음식으로 생각해보면, 나는 체질적으로 느끼함과 잘 맞지 않았다. 과민성 대장증후군으로 인해, 느끼하고 기름진 음식을 먹으면 바로 배탈이 났다. 그래도 어릴 때는 배탈이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젠 꽤 심해져서 느끼한 음식은 최대한 피하려 한다. 하지만 음식에 따라 기름기어느정도 있을 수 있다. 따라서 느끼하다의 사전적 의미에서 중요한 것은, 기름기가 아니라, '많다' 는 것이다. 내가 배탈이 났던 것도, 내 체질상 소화할 수 있는 기름기의 총량이 남들보다 적은데, 그보다 더 많은 기름기를 먹었기 때문에 탈이 난 것이다.


 이 느끼함. 즉, '많다' 는 것을 사람으로 생각해본다면. 사람에게 많을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 생각, 말, 느낌. 어려운 말로 하면. 사고, 언어, 감정. 그러면 내가 벗어나고 싶어 하는 느끼한 사람이란. 무엇인가를 표현할 때 사고, 언어, 감정을 '과잉되게 표현하는 사람'일 것이다.  


 내 성장 환경을 돌이켜보면 '과잉되게 표현하는 사람'은 환영받지 못했다. 어릴 때 억울한 일이 있어서, 나를 변호하기 위해 자세하고 길게 말할 때면, 형은 내게 "남자 새끼가 징징거리지 마." 라고 말하곤 했다. 군대에서도 비슷했다. 선임이 묻는 말에는 최대한 '네 그렇습니다' 또는 '아닙니다.' 만 써야했다. 그리고나서 이유라도 설명할라 치면, "됐고, 그래서 네가 했어? 안했어?" 라는 말을 들었다. 일할 때도 마찬가진 게, 높은 분들은 집중력이 매우 떨어진다. 그래서 결론을 처음에 말하거나 아니면 그냥 결론만 말했다. 이렇게 해야 그나마 들어줬다. 그들에게 근거나 이유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물론 회의시간이 짧아져 나도 좋긴 했다.


 이런 체질과 환경들 덕분인가 나는 불필요한 말을 최대한 안 하는 방향으로 훈련된 거 같다. 썩 긍정적인 훈련이었다고 생각되진 않지만, 어쨌든 담백해지는 데 아주 조금 도움이 된 거 같다.




 그렇다면 내가 담백한 사람이 되고 싶은 이유. 즉, 담백한 글이란 건 무엇일까?


 어릴 때 책 읽는 걸 좋아했다. 그러다 문학을 좋아하게 됐다. 계속 읽다 보니 어느 순간 나만의 글을 써보고 싶었다. 처음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내가 쓴 글들이 많아졌다. 내가 보기엔 내가 쓴 글들이 괜찮아 보였다. 이 글들을 타인은 어떻게 볼 지 궁금해졌다. 


 20대 후반에 글쓰기 모임에 가입했다. 오프라인 모임에 가게 됐다.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합평이란 걸 해봤. 그날 내가 느낀 합평이란, 타인글을 보고 그 글쓴이에게 상처 주는 시간 같았다. 나는 문예창작 전공도 아니었고, 아마추어 중에 아마추어였다. 그래서 모임에 있던 전공자가 내게 하는 거의 욕에 가까운 합평은 꽤나 충격이었다. 가장 충격이었던 말은 "에세이가 전혀 에세이 같지 않아요. 논리가 하나도 없어요. 일기 같아요." 였고, 두 번째로 충격적이었던 건 "글이 너무 느끼해서 못 읽겠어요." 였다. 그 얘기를 듣고 있자니 차라리 그냥 욕을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첫 번째는 뭐 내 글 실력이 좋지 않은 것이니 어쩔 수 없다 해도, 두 번째는 동의할 수 없었다. 평생을 담백해지는 훈련을 받아온 내게 느끼하다니? 그 전공자가 느끼하다는 이유로 든 것은 3가지였다. (1)문장이 쓸데없이 길다. (2)잘난 척한다. (3)감정 과잉이다. 이걸 들으며 속으로, '지는 전공자인데도 글을 잘 못 쓰면서, 내 글이 느끼하다고?' 라고 생각했다. 근데 진짜 솔직히 그 전공자의 글도 별로였다. 그렇게 계속해서 회원들은 웃으며, 서로의 글에 대해 욕했다. 그러다 자리가 끝났다. 그 이후로 나는 그 모임에 나가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도 글은 계속 썼고, 다른 글쓰기 모임들에 나갔다. 역시 전공자는 한, 두 명씩 껴 있었다. 그리고 합평 시간들도 있었다. 그런데 전공자던 아니던, 내게 해주는 대부분의 합평들이, 맨 처음 모임에서 들었던 내용과 비슷했다. 글이 전체적으로 과잉되었다는 것. 하지만 그때도! 나는 사람들이 글을 보는 안목이 없다고 치부했다. 언젠가 눈 밝은 사람이 내 글을 알아봐줄 것이라 생각하며, 비판들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뭘 믿고 그랬는지 모르겠다.


 시간이 흘러, 알라딘에 팔 책들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김훈의 '칼의 노래'를 다시 봤다. 잠깐 훑어본다는 게, 자리까지 잡고 오랫동안 빠져 읽었다. 작가의 문장들은 군더더기 없고, 힘 있고, 간결했다. 읽는 내내 느끼한 문장이 단 하나도 없었다. 책을 덮었다. 노트북을 켜서 내가 쓴 글들을 봤다. 그리고 생각했다. 느끼해서 못 읽겠다.




 좋은 글의 요소는 다양할 것이다. 논리, 작가만의 문체, 세계관, 절제, 유머, 새로운 생각 등등. 물론 어떤 글이든 가장 중요한 것은 '진정성' 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글담백한 글은 다르다. 좋은 글과 담백한 글, 둘 모두에 진정성이 있다면, 나는 내 글이 담백했으면 좋겠다. 담백한 글에는 좋은 글의 요소 중 몇 개가 부족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아직 느끼한 글을 쓰는 사람이어서 그런지, 지금 내겐 담백함이 더 중요하다. 


 일단 글이 좋고 말고를 떠나서, 독자가 내 글을 참고 끝까지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느끼한 글은 나도 몇 줄 읽고 못 읽으니까. 담백한 글은 그래도 참고 읽을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이 담백함이야말로 아마추어 작가인 지금 내가 갖춰야 할 덕목이다. 그러기 위해선 느끼함, 과잉이 없어야 한다. 나 스스로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하는 자아도취, 절제하지 못한 채 내가 느낀 감정들을 늘어놓기만 하는 감정과잉, 잘난 척하기 위해 길고 어렵게 쓰는 문장들. 이런 것들에서 벗어나야 한다.  


 내가 쓴 글들은 여전히 느끼하다. 담백한 글 쓰기는 아직도 어렵다. 하지만 작가와 글은 닮는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담백한 사람이 되면 담백한 글을 쓸 수 있을거라 믿는다. 그렇게 되면 내가 쓴 담백한 글로, 먼저 나와 독자 사이에 균형을 잘 잡고 싶다. 그리고 나중에 정말로 글을 잘 쓰게 되면. 내가 쓴 좋은 글로 독자를 내 쪽으로 확 끌어당기고 싶다. 그렇게 된다면 좋겠다. 지금은 내 글을 읽은 사람에게, 이런 말을 들으면 기쁠 것 같다. "이번 글은 읽을만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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