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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제이 Dec 10. 2022

실업의 추억

추억이라는 표현을 써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살면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악몽 같았던 날이 몇 번 있었는데 그중에 하나가 실업의 추억이다. 10년 전 일이다. 12년간 다닌 회사에서 이직을 결심하고 퇴사를 했다. 내가 하는 분야에서 다양하고 폭넓은 지식과 경험을 쌓고 싶었다.


이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새로운 직장에 출근을 했다. 그런데 새롭게 출근한 직장에서 문제가 생겼다. 인생을 살다 보면 누구의 잘못이라고 명확하게 말할 수는 없으나 일이 어긋나는 경우가 있다. 이 회사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지인이 소개해준 회사였는데 문제가 생겨 부득이하게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다음이 문제였다. 준비 없이 퇴사를 대가는 너무 혹독했다. 어린 아들과 딸이 있었고 아내는 전업주부다. 박봉의 샐러리맨에게 갑작스러운 실직은 청천벽력과도 같다. 보통의 샐러리맨들이 그렇듯이 통장 잔고는 여유가 없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일용직과 한 달 벌어 한 달 사는 샐러리맨과 별반 차이가 없는 것이다.


아내가 경제 활동을 하지 않는 외벌이 가장들의 실직은 상상을 초월하는 심리적인 압박이 있다. 압박을 넘어 공포감이었다. 내가 일을 하지 않으면 4명의 가족은 굶어 죽을 수도 있겠구나..... 엄살이 아니라 팩트였다. 도움을 청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도움을 청할 곳도 딱히 없었다.


정치권에서 자주 등장하는 용어처럼 혐의가 있는 사람이 사망하여 ‘공소권 없음’ 처분을 내리고 수사를 종결할 수도 없다. 내가 죽어도 남은 사람들의 삶은 더 고통스러워지고 상황은 종결되지 않는다. 가장은 죽고 싶어도 죽지도 못한다. 차라리 죽는 건 쉽다. 사는 게 더 어렵다.


다시 직장을 구하기 시작했지만 쉽지 않았다. 이력서도 많이 썼고, 지인들에게도 도움을 청했지만 취직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5개월 돼도 직장이 구해질 않으니 별생각이 다 들었다. 아이들을 속이고 출근 행세를 하는 것도 너무 싫었고, 비참했다. 아이들 눈을 피해서 출근시간에 산으로 올라가는 가장의 모습은 참혹하고, 비굴하고, 잔인하고, 잔혹하고 비참해서 죽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들게 했다.


경춘선 김유정역(폐역). 갈 곳이 없어서 여기저기 떠돌아다녔다.


실로 삶과 죽음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산에 올라가서 죽겠다고 생각하면 바위에서 뛰어내리는 것이고, 살겠다고 생각하면 집에 와서 고무장갑 끼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익히 보아왔던 가장들의 실직과 자살, 생활고에 시달리다 일가족의 동반 자살. 그것이 과연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생활고로 인한 자살이 아니더라도 사람에게는 누구나 비슷한 상황으로 삶과 죽음의 선택의 기로에 내몰릴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나는 예외일 것이라는 오만함을 버리지 않는다면 준비되지 않은 불행이 닥쳤을 때 당신도 무너질 수 있다.


간절하면 이루어진다고 했고, 기도하면 들어주신다고 했는데 간절함이 부족하고 기도가 절실하지 않았던 탓일까? 저축해 놓았던 돈도 생활비로 모두 쓰고 나니 통장의 잔고는 0원이 되었다.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3일 동안 30시간을 주방에서 설거지를 했다. 


이승과 저승의 차이는 참으로 가볍고 시시한 것이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자살하는 사람들의 심정도 헤아리게 되었다. 자살을 하는 사람들은 단계가 있다. 결과를 놓고 보면 갑자기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자살을 하기까지는 많은 고통과 인내의 시간들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에 누가 되었건 함께 있어 줘야 한다. 우울증이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마흔에 하는 아르바이트는 단순한 아르바이트가 아니라 가족의 생명을 지키는 직업이다. 20대 때에 경험 삼아 일했던 바텐더나 서빙을 생각하면 안 된다. 낭만이 있지도 않고 시선도 곱지 않다. 경험은 이미 충분히 했고 냉혹한 생존만 있을 뿐이다. 스트레스로 인해서 면역력이 파괴된 것인지 수개월간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기도 했고, 야뇨증이 생기기도 했다.


몇 시간을 멍하게 앉자 있다가 집에 왔다.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염장커플들이 자주 보였다.


인디언 기우제라고 하던가? 인디언들이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면 결국 비가 온다고 하는데 나도 직장이 구해질 때까지 이력서를 냈다. 하늘이 도와서 6개월 만에 직장을 구했지만 만족스럽지는 못했다. 지금까지의 명함과 계급장을 다 내려놓고 급여까지 삭감되어 다녀야 했다. 살면서 경험하지 않아도 될 것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건들은 가급적이면 안 일어나는 것이 좋다. 


안 좋은 기억은 오래가기 때문에 가능하면 좋은 기억으로만 인생을 채우고 싶다. 슬픔도 여러 가지가 있을 텐데 가장 힘든 슬픔 중에 하나가 가족을 책임지는 가장의 실업이 아닌가 싶다. 있을 수 있는 얘기나 웬만해서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가장의 실직은 가족의 붕괴로 이어지고, 가족의 붕괴는 사회의 붕괴로 이어진다. 세상도 많이  발전했으니 사회적 안전망도 있어야 되지 않나 싶다.


요즘은 여성 가장도 많다. 생활고로 인한 가족의 동반자살이라는 것은 얼마나 비극적인 것인가? 끔찍하게 슬픈 이야기다. 10년 전의 일이지만 지금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오랫동안 트라우마로 자리 잡고 있을 것 같다. 지금 이 시간에도 새벽에, 야간에 불철주야 뛰고 있는 가장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박수를 보낸다. 가족을 위해 뛰고 있는 당신께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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