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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제이 Nov 08. 2022

그녀는 예뻤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가장 흔하면서도 가장 귀한 말 사랑.

오늘도 아이들 학원비 벌기 위해, 대출금을 갚기 위해 전쟁 같은 하루를 보내고 왔다. 숨 가쁘게 하루하루 흘러가는 팍팍한 삶 속에서 내게도 과연 연애와 사랑이라는 것이 있었던가? 기억을 더듬어 본다.


군대를 제대하고 난생처음 소개팅을 했는데 그때 첫눈에 반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첫인상도 좋았지만 대화를 하면서 그 녀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긴 단발머리에 가느다란 쌍꺼풀, 청바지에 하얀 티셔츠를 입고 있었던 그 녀. 꽤 오래전 일인데 지금도 기억이 또렷하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에게 그 사람이 왜 좋으냐고 물으면 "그냥 좋다"는 말을 한다. 


그 말은 그 사람이 예쁘고 잘 생겨서, 혹은 내세울 만한 타이틀이 있어서 좋다는 말이 아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좋은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눈빛과 표정, 사소한 행동에서 느껴지는 진심 때문에 좋아하게 되는 것 같다. 그 녀와의 인연은 딱 6개월이었다. 3개월은 남들처럼 만나서 밥 먹고, 차 마시고, 영화 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태어나서 처음 꽃을 선물해 보기도 했고, 좋아하는 음악도 선물했다. 나머지 3개월은 그 녀가 이별을 얘기했을 때 감정을 정리하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예고도 없이 끝내는 건가? 그 녀가 실망스러웠다. 스물세 살이라는 나이에 첫사랑을 경험하고 치러야 하는 대가는 혹독했다. 밥을 먹을 때면 숟가락에 그녀의 얼굴이 떠 올랐고 심지어는 공사장에서 삽질을 할 때 삽 속에도 그 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비유나 과장 아니라 사실이다.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밥이 목으로 넘어가지 않는다는 표현이 딱 맞았다.


나도 순수했었나 보다. 가벼운 스킨십조차도 없는 풋사랑에 인생이 끝난 것 마냥 아프고 괴로워했던 것을 보면. 지금처럼 세파에 찌들고 혼탁해진 영혼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순수함이다. 처음 해보는 연애라, 많이 좋아했던 사람이라 이별하는 것도 힘들었다. 사랑하는 것에도 시간이 필요하지만 이별하는 것도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사랑은 혼자서 아무리 좋아해도 소용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녀는 “누구를 만나서 연애를 할 만큼 마음에 여유가 없다며 미안하다”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주었다. 나는 우리가 왜 그만 만나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알고 싶었지만 이유를 묻지는 않았고 시간이 필요하면 기다리겠다고 했다. 헤어지기 위해 일부러 이유를 만드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 녀와 헤어진 후 3개월 동안 지독하게 가슴앓이를 했다. 사람을 얼마큼 좋아하면 꿈에도 나오고, 얼마큼 힘들면 밥이 넘어가지 않는가를 경험했다. 그리고 또 알았다. 오래 만났다고 깊은 사랑이고, 짧게 만났다고 가벼운 사랑은 아니라는 것을. 그 녀와 헤어지고 아마 3년쯤 지났을 때다. 길을 가다가 그 녀를 소개해준 선배에게 우연히 소식을 전해 들었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그 무렵 그 녀는 가족의 일로 많이 힘든 시기였다고 한다. 


갑작스러운 오빠의 죽음과 부모님의 이혼으로 많은 방황을 했다고 한다. 엄마와 함께 어린 동생을 보살피면서. 그 이야기를 듣고 집에 돌아와서 그날 밤은 잠을 제대로 못 잤다. 선배를 통해 다시 만날 수도 있었지만 연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후 그 녀가 살던 집 근처에서 차를  세우고 한 참을 있다가 왔다. 잘 살고 있는지 얼굴이라도 보고 싶었지만 집으로 왔다. 


그 녀와 헤어진 후에 다른 사람을 몇 차례 소개를 받고 연애를 시도해 보았지만 결과는 좋지 못했다. 그리고 또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후 지금 옆에 있는 아내를 만났다. 아내는 설렘보다는 편안한 사람이었다. 밝고, 순박한 아내의 매력에 빠져서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다. 지금은 아내와도 연애시절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담담한 마음으로 살고 있다. 첫사랑과는 6개월을 만났고 아내와는 15년 동안 살고 있다.


아내와는 좋은 기억도 많지만 나쁜 기억도 있다.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 상처 주는 말도 주고받고, 자존심 상하는 말도 주고받으며. 사랑이란 무엇일까? 아가페, 필레아, 에로스, 스트로겐 등 많은 사랑의 종류가 있다고 한다. 그때 첫사랑도 사랑이었고 지금 아내와의 사랑도 사랑이다. 사랑의 방법도 시간이 흐르면서 달라질 수 있다. 사랑이란 헤어지면서 그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는 것이 아니라 미워도 함께 있어주는 것이 아닐까? 


모든 남편들에게 아내는 마지막 사랑이다. 첫사랑보다 중요한 것이 마지막 사랑이라고 하지 않던가? 피천득 님의 수필 "인연"에서 처럼 나도 2022년 버전  "아사코"를 상상해보기도 했는데 그건 내 스타일이 아닌 것 같다. 추억은 추억으로 남을 때 아름다운 것. 아내가 브런치를 몰라서 다행이다. 혹시라도 이 글을 읽게 된다면 너그러운 마음으로 윤허하여 주시길. 25년 전 이야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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