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커리어 씨앗을 키운 문장
When you are in the dark, you are planted. Not buried.
저는 작고 어두운 원룸에 혼자 있었습니다. 허리 부분이 푹 꺼지고 딱딱한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저의 손에는 누군가에게 선물 받은 책이 있었습니다.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였습니다.
“그대라는 꽃이 피는 계절은 따로 있다. 각자 그 계절을 준비하자”
내가 꽃이라고?
이 문장을 보니 참았던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습니다. 저는 직전에 불합격 문자를 또 하나 받았습니다. 인턴에 지원했던 모든 회사에 떨어진 참이었어요. 저는 제가 꽃이 피어나는 씨앗이 아닌 줄 알았습니다. 깜깜한 흙속에 묻힌 그저 작은 돌멩이 같았어요.
대학교 생활은 열심히 했습니다. 게임을 좋아해서 다른 친구들보다 피시방에서 보낸 시간이 조금 더 길었지만 학교 수업은 열심히 들었습니다. 학회나 동아리보다는 연애가 재미있어서 인턴 지원서에 쓸 만한 이력이 많지는 않았지만 학점은 나쁘지 않았어요. 하지만 인턴의 벽은 생각보다 높았습니다. 수십 곳에 인턴 지원서를 제출했지만 합격한 곳은 없었습니다. 불안했던 그때 <아프니까 청춘이다>의 그 구절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나’라는 새싹이 자라나는 계절이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끝까지 돌멩이가 아니라 씨앗이라 믿으며 어떻게든 싹을 틔워 보자고 다짐하면서요.
그로부터 시간이 꽤 지난 후에 대기업에서 첫 인턴의 기회를 잡았습니다. 돌멩이인줄 알았던 씨앗에 아주 작은 싹이 난 것이죠. 인턴으로 일했던 회사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습니다. 많이 배우고 또 좋은 성과도 내고 싶었어요. 어렵게 틔운 싹을 조금이라도 더 크고 튼튼하게 만들고 싶었습니다. 인턴의 성장도 중요하게 생각해 주는 좋은 선배들과 마음이 잘 맞는 동기를 만나 상반기 인턴 프로젝트에서 1등을 했습니다. 어렵게 잡은 첫 회사에서의 작은 성취였습니다.
그 대기업에서 정직원 전환 제안을 받았지만 저는 제 커리어 씨앗을 P&G라는 외국계 기업으로 옮겨 심었습니다. P&G에서 그 인턴 프로젝트의 사례를 매우 흥미로워했거든요. 당시 저는 영어를 잘하지 못했어요. 학교에서 영어로 된 수업을 듣는 정도가 전부였고, 외국인과의 대화는 전혀 해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영어를 잘하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 P&G 면접에서 예상되는 모든 질문에 영어로 스크립트를 만들고 달달 외웠어요.
영어를 잘하지 못하니 외국계 기업에서 한동안은 바보처럼 지냈습니다. 외국인 상사를 화장실에서라도 마주치면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기도 하고, 회의에서 나눈 대화를 이해하지 못해 미팅이 끝나고 선배들에게 무슨 말이었냐고 물어보는 일도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외국계 기업에 도전한 이유는 외국계 기업이라는 새로운 땅에서 저의 커리어 씨앗을 더 튼튼해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영어라는 언어 장벽은 분명 큰 걸림돌이었지만 앞선 조직 문화와 다양한 나라의 일잘러들을 보고 배우며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6년 가까이 P&G에서 브랜드 매니저로 일했습니다. 커리어의 씨앗을 옮겨 심을 때의 기대처럼 저는 P&G에서 여러 브랜드를 담당하며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 상사, 동료와도 많은 일을 했습니다. 이후 저는 커리어 씨앗을 토스, 샌드박스네트워크, 마이리얼트립, 무신사와 같은 스타트업으로 다시 옮겨 심었습니다. 대기업과는 다른 방식으로 고객의 삶과 시장의 큰 흐름을 바꿔나가는 스타트업들이 궁금했거든요. 무엇보다 ‘대기업’이라는 온실을 벗어나 나의 커리어 씨앗을 더 단단하게 성장시켜줄 야생에 펼쳐진 멋지고 어려운 일들이 재미있어 보였습니다. 스타트업에서 저는 대부분 팀장으로 일했고, 몇몇 회사에서는 실장으로 일하며 많은 팀원들을 관리하고 회사의 중요 의사결정에 직접 참여해 보기도 했습니다. 스타트업에서 일했던 순간에서 어느 무엇 하나 쉬운 것이 없었지만 그만큼 배움 또한 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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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올해로 12년 차 회사생활을 하고 있어요. 어두운 원룸에 덩그러니 놓인 돌멩이가 아닐까 걱정했던 저의 커리어 씨앗은 다양한 회사에서 성공과 실패의 경험을 반복하며, 이제는 꽤 튼튼한 줄기가 되었어요. 요즘도 저는 회사에서 누굴 보며 배워야 더 빨리 자랄 수 있을지, 어디서 더 깨끗한 물과 영양분 넘치는 비옥한 토양과 같은 성장 경험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제 저는 알고 있어요. 커리어는 씨앗입니다. 우리 모두 커리어라는 씨앗을 심고 키우고 있습니다. 모두가 알고 있듯, 씨앗에서 싹이 트기 전에는 가장 어두운 땅 속에 있습니다. 어두운 땅속에서 배울 수 있는 훌륭한 선배들을 만나서 배우고, 조금씩 더 어려운 문제를 풀어 보고, 그 과정에서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고, 결국 내가 남들보다 잘 풀 수 있는 크고 멋진 문제를 만나 직접 해결하며 영양분을 얻다 보면 씨앗이 새싹을 틔우고, 새싹이 점점 튼튼해집니다.
아무도 모를 일이에요. 돌멩이 같았던 작은 씨앗에서 아주 예쁜 꽃이 자랄 수도, 누구보다 크고 튼튼한 나무가 자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힘들더라도 나라는 커리어 씨앗에 열심히 물을 주고 좋은 땅으로 옮겨 심어줘야 합니다. 한 가지는 확실해요.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캄캄한 어둠 속에 있을 때 우리는 그저 묻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때 묻혀 있는 것이 아니라 심겨 있는 것입니다. 돌멩이가 아니라 씨앗이니까요. 커리어의 싹을 틔우지 못해, 싹이 큰 줄기가 되지 못해 불안하다면,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는 모두 씨앗이고, 그 씨앗이 어떤 싹을 틔울지는 아무도 모르고, 그중 어떤 씨앗은 조금 늦게 새싹을 틔우기도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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