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언제 와요?
금수저 은수저 하는 단어도 없던 시절이었다. 여행을 간다고 회사를 관둔다고 하면 사람들이 어디 가서 짜고 오기라도 한 건지. 그렇게 안봤는데 집에 돈 좀 많나 봐 표정을 짓고 나를 위 아래로 훑었다.
아뇨. 나는 7살에 울 아빠를 잃었다. 우리 집은 원래도 잘 사는 편이 아니었는데 아빠를 잃고는 못사는 레벨로 툭 떨어져 버렸다. 적어도 내가 기억하기엔 그랬다. 사랑하는 남편을 불시에 잃은 엄마는 슬픔에 잠겨있을 시간도 없이 꼬꼬마였던 오빠와 나를 먹여 살려야 했다.
호랑이 외할아버지가 유난히 아꼈다던 셋째딸 우리 엄마는 서른일곱에 가장이 됐다. 강해져야 했다. 어느 주말엔 오빠랑 나랑 엄마랑 같이 주말에 손수레를 끌고 나가서 폐지를 모았다. 엄마가 어디선가 듣고 왔다며 쌓아둔 폐지에 물을 뿌렸다. 쨍쨍한 햇살 때문에 무지개가 생겼다. 이러면 나중에 종이가 조금 더 무거워진다고 했다. 나는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하던 엄마가 주차장 셔터를 내리고 상자에 물을 뿌리는 모습을 바라봤다. 물 먹은 종이는 마르고 나면 쭈글쭈글해질 뿐 무거워지진 않았다.
우리에게 닥친 변화나 엄마에게 주어진 삶의 고단함이 어린 나에게도 느껴졌던 것 같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밤새워 일한 엄마가 자고 있었다. 나는 무릎을 꿇고 가만가만 엄마한테 기어가서 자는 엄마 코 밑에 손가락을 댔다. 엄마가 숨을 쉬는 게 맞는지 확인했다. 사랑하는 아빠가 갑자기 사라졌으니 뭐든 사라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쓰러져 자는 엄마가 내쉬는 고르고 따뜻한 숨이 그때의 나에게 가장 분명한 확신이었다.
엄마는 우리가 겁나는 게 알았던 건지 아니면 씩씩해지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인지 쑥스러움도 없이 길에 나가 호떡도 굽고, 버터 오다리도 굽고, 호두과자도 구워 팔았다. 아직 엄마의 관심이 필요했던 어린 오빠와 나는 엄마가 일을 가는 게 싫어서 일부러 엄마의 신발이나 앞치마를 꼭꼭 숨겼다. 이것만 없으면 엄마가 일을 못 갈 거라고. 우리는 엄마에게 오늘은 안가면 안되겠냐 애처롭게 묻다가 엄마가 마음을 안 바꿀 것 같으면 그럼 가면 언제 오느냐고 다시 물었다. 엄마는 큰 파란 플라스틱 통에 호떡 반죽을 만들면서 이것만 다 팔면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근데 이스트를 넣은 호떡 반죽은 시간이 지날수록 자꾸만 부풀어 올랐다. 대체 호떡을 몇 개나 팔아야 다시 엄마랑 시간을 보낼 수 있는지, 잘 부풀어 오른 호떡 반죽이 미웠다.
오늘은 엄마 일이 언제 끝날까. 언제 우리랑 같이 집에 있을까 싶어 가끔은 엄마 따라 장사를 나갔다. 호떡 리어카 옆에 서서 호떡 맛있어요 텔레파시를 지나가는 사람마다 보냈다. 텔레파시에 소질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해서 엄마는 몇 차례에 걸쳐 종목을 바꿔 길가게를 이어갔다.
한 때의 메뉴는 호두과자였다. 호두과자 반죽에는 연유 한 캔이 통째로 들어간다. 엄마는 우리가 옆에서 반죽을 도우면 잘했다는 의미로 남은 연유를 숟가락으로 삭삭 긁어 나랑 오빠 입에 떠넣어 줬다. 몸이 부르르 떨릴 만큼 단 연유를 밥숟가락으로 떠먹는 게 우리의 작은 사치였다. 모든 게 예민한 사춘기에는 엄마가 길에서 장사를 하는 걸 아는 애들이 볼까 봐 얼굴을 푹 숙이고 어묵 꼬치와 국물 컵을 씻었다. 엄마한테는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들킬 수는 없어서 괜찮은 척했다.
그런데 내가 팔자 좋은 여행자라니. 엄마가 꼬치에 끼워 판 어묵이 오빠와 나를 학교에 보내고 어른으로 키웠는데. 돈 없어서 마음 졸였던 시간을 하나하나 일러줄까 하다가 그 사람들의 시기 어린 질투를 즐기기로 했다. 어차피 그 사람은 우리 엄마가 꽂은 어묵이 몇 개인지 들으면 그럼 더 돈을 벌어야지 쓸 때냐고 물어볼 거니까. 가난과 기침은 숨기려 해도 티가 난다고 했는데 나한테 가난이 묻어있진 않나 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