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쩐지 이 상황이 거짓말 같아서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꺼내봐야겠다. 내게 서핑을 알려준 남자. 이 이야기를 설명하지 않고는 내 여행이 어떻게 꼬였는지 설명하기 어려우니까.
햇빛에 웃고 있는 사람들의 미소에 눈이 부셔서 눈을 질끈 감았다. 꿈에 그리던 하와이가 꼭 그대로 눈 앞에 펼쳐져 있다고 들떠서 그랬을까? 그날 와이키키 바다 한가운데에서 그 앨 만났다. (악연에도 시작은 있는 법)
바다는 아직 낯선 곳이었던 나는 룸메 트리니티를 따라 바다에 나갔다. 하와이에서 지낸 지 3개월 됐다는 트리니티를 따라서 해변에다 비치수건을 깔고 그 위에 지갑이랑 휴대전화기를 잘 숨겼다. 그리고 우리는 곧장 바닷물로 뛰어들었다. 에메랄드 바닷물은 예쁘기만 한 게 아니라 머리가 쨍하고 맑아질 만큼 시원했다. 해변에 두고 온 지갑이나 휴대전화기를 잃어버릴까 걱정했던 거나, 중요부위만 가린 비키니가 내심 민망했던 것, 선크림이 눈에 들어가면 어쩌지, 생각했던 것들이 삽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자꾸만 웃음이 났다. 말도 안 되게 예쁜 에메랄드 바다에 드러누워서 둥둥 떠다니면서 이런 세상이 진짜 있었네 하고 혼잣말을 하고 웃었다. 지금 당장 이 꿈에서 깨서 김해에 있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트리니티랑 숙소에서부터 낑낑거리면서 들고온 침대 모양 튜브를 쓰기로 했다. 저기 멀리 서퍼들을 조금이라도 가까이 보고 싶어서 열심히 손을 놀렸다. 에메랄드 파도 위에서 우아하게 미끄러지는 서퍼들은 맙소사. 하는 감탄사가 절로 터져 나올 만큼 멋졌다. 부러움이나 욕심이 비집고 들어올 틈 같은 건 하나도 없이 멋진 세상을 처음 보는 아이의 마음이 들었다. 파도를 잡아타는 서퍼들을 한 명씩 눈으로 좇았다. 매끄럽게 미끄러지는 사람, 허탕 치는 사람, 파도에 휩쓸리는 사람 중에 패들 보드를 탄 애가 있었다.
다른 서퍼들이 몰려있는 포인트에서 멀리 떨어진 채로 혼자 큰 보드에 우뚝 서 있어서 그 애가 눈에서 뛰었다. 서퍼 하면 떠오르는 모습 그대로 생겼다. 보드 옆에 떨어진 검정 모자 때문인지 노를 가지고 낑낑대고 있었다. 아니 멋진 서퍼가 바다에 떨어진 모자나 주우려고 저러고 있다고? 와이키키가 너무 예뻐서 터무니없이 들떠있었던 게 분명하다. 영어도 못하면서 그 서퍼한테 소리를 지르고 있었으니까.
그거 니 모자야? Is that your hat? 안 들렸다면 더 좋았으련만 내 목소리를 그 애도 들었나 보다. 내 쪽을 쳐다보더니 그 애가 갸웃거렸다. 그러고 또 암말 안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말도 안 되는 풍경 속에 서 있는 멋진 그 애가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거리에 있다는 게 너무 신기했던지 나는 또박또박 끊어서 "Is, That, Your, Hat?" 하고 다시 소리쳤다.
그러고 순식간에 정신이 들었다. 예의 없는 행동이었으면 어떡하지? 걱정하려는 찰나에 그 애가 노를 저어서 순식간에 나한테 미끄러져 왔다. 세상에! 까무잡잡한 그애 위 가슴팍에서 에메랄드 펜던트가 반짝였다. 목걸이가 잘 어울리는 남자는 처음이네. 뭐라고 했어? 안 들려서 여기로 왔어. 라면서 그 애 초록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는데 나는 이 상황이 어쩐지 거짓말 같았다. 당황한 나는 더듬거리면서 아 그러니까 그게 네 모자였냐고 물어본 거였어. 남의 모자를 주워 쓰는 줄 알고. 하고 했더니 그 애는 피식 웃고는 응 내 모자야 하고는 자기 이름을 알려줬다.
나는 수진이라고 알려주고 부르기 힘들면 수잔이라고 부르라고 덧붙였다. 몇 살이냐고 물어보려다가 미국식 나이 계산이 헷갈려서 태어난 해를 물었더니 내가 자기 할머니같이 말한다며 그 애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유 없이 뿌듯했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도중에 그 애는 몇 번이나 고개를 뒤로 젖혀 바닷물에 머리를 담갔다. 그럴 때마다 그애 머릿결은 물에 닿아 미역처람 매끈해졌다.
에메랄드 바다와 서퍼같이 생긴 걔가 너무 멋져서 아무렴 어때하고 생각했다. 잘 생겼지만 느끼하게 생겨서 내 타입은 아니네. 그애 보드를 힐끔힐끔 쳐다본 게 티가 났는지 그 애가 별거 아니라는 듯이 타보겠느냐고 물었다. 응! 하고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이고는 수영을 못한다고 덧붙였다. 못타게 할까봐 쫄았는데 걔는 자기도 수영은 할 줄 모른다면서 씩 웃고는 나에게 보드를 양보해줬다.
튜브에서 그리로 넘어가 그 애 손을 잡고 보드에 올랐다. 무릎을 일으켜 보드에 앉는데 그 짧은 순간에 갑자기 작은 비키니가 다시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처음 패들 보드를 타보느라 떨리는 건지 그 애 때문에 떨리는 건지 구분할 정신도 없었다. 잘 타서 좋은 인상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잘 생겼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으면서.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타본 일어선 패들 보드였다. 보드 중앙에 두 발을 디디고 섰을 뿐인데 프로 서퍼가 된 것만 같았다. 노를 저어서 앞으로 가보기도 하고 방향을 바꿔서 회전도 했다. 조금 더 하면 감 잡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 정도면 오늘의 행운은 충분했다 싶어서 예의 바르게 보드를 돌려줬다.
근데 그 애가 초록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는 “전화번호를 알 수 있을까?” 하고 물었다. "내 번호를 못 외워"고 답하곤 어제 유심을 샀다고 덧붙였다. 더듬더듬 생각하면 기억이 날 것도 같은데 그게 내 번호인지 확신할 수 없어서 어깨만 으쓱하고 말았다. 바다 한복판에서 번호를 준대도 그 애가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엇갈리는 것 보다는 아쉬운 편이 낫지.
그때 룸메이트가 불쑥 끼어들었다. 비치에 가서 확인하면 되잖아? 내가 헤엄쳐서 바다에 나온 것 중에 제일 먼 거리라서 다시 돌아갔다가 올 수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근데 노아가 그러자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마니! 룸메이트랑 집에 돌아가면서 '재미있는 하루였다 그렇지?' 하고 물었더니 걔는 서퍼가 나만 쳐다봤다는 엉뚱한 답을 했다. 나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걸었다. 불안함인지 설렘인지 모를 감정에 마음이 두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