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oodsoozin Nov 11. 2019

바다에서 비밀은 안전해

나는 이미 글렀네

서핑을 하다보면 서퍼들이 모여있는 포인트를 자연스럽게 읽게 된다. 파도가 항상 부서지는 곳이라 이름을 붙여 부르는데 그 날은 퀸즈에서 서핑을 하고 있었다. 학교를 마치고 온 건지 십대 여자애 하나가 내가 있는 퀸즈로 패들링을 해왔다. 군살 하나 없이 매끈한 사춘기의 몸, 태양이 온 몸에 입을 맞춘듯 구릿빛으로 태닝된 피부가 물에 닿아 반짝거렸다. 인간의 몸이란 거 정말 아름다운 거야. 그런 애들을 볼 때마다 생각했다. 


입고 태어난 것처럼 딱 맞는 비키니를 입은 걔는 장난 치면서도 멋지게 파도를 낚아챘다. 패들링을 하다가 에이 이번 건은 그냥 보내야겠네 하고 나를 이미 지나간 파도를 쳐다보면 그앤 파도 위에 올라타 저 멀리 미끄러지고 있었다. 서핑 세포가 몸에 있나봐. 좋은 파도가 또 다가와서 쟤도 이번 거 잡으려나 싶어 쳐다 보니까 그새 파도에는 흥미를 잃은 건지 다른 여자애랑 속닥속닥 하다가는 둘이서 포인트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내 어릴 적 시간이 떠올랐다. 김해는 작았고 지루한 동네였다. 버려진 하천을 따라 걷거나 모텔이 가득한 길을 걸어 집에 갔다.  하고 싶은 이야기에 따라 길을 늘려 걸었다. 내가 짝사랑하고 있던 요한이가 오늘 뭘 했는데 그걸 봤냐는 이야기, 지연이도 요한이를 좋아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 옆반에 찬성이가 보라한테 고백했다는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는 가십을 자기가 아는 만큼 풀어놓으며 집에 갔다. 


우리가 늘려 걸었던 길은 학교 바로 아래에 있던 하천이었다. 버려져 있다시피한 하천에는 6학년 누가 내기해서 저기로 뛰어 내렸다더라. 그래서 구급차가 출동했다더라는 이야기만 무성했다. 비밀이 떨어진 날엔 개미를 관찰하거나 조악한 조각상이 새겨진 술집 앞에 앉아 우리만의 게임을 만들어 놀았다. 


하와이에는 코너마다 바다가 있으니 사라질 공간도 많았다. 혼자가 되고 싶다면 혼자, 둘이 되고 싶다면 완벽히 둘이 될 수 있는 공간이 널려 있었다. 파도가 부서지는 서핑 포인트를 넘어서 사라진 여자애들 둘이서 누가 누구를 좋아하는지, 오늘은 내가 좋아하는 애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 조잘 거리고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모든 비밀이 바다에서 속삭여질 이 섬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부러웠다. 나도 내가 좋아하는 아이 이야기를 에메랄드 바다 위에 둥둥 떠서 파도소리를 들으면서 햇살을 온 몸으로 맞으면서 나눴다면 좋았을 텐데. 문닫은 술집 앞이 아니라 버려진 하천 옆이 아니라. 나중에 거기서 만나. 라고 하면 보드를 들고 바다로 와서. 바다에서는 시계를 볼 수 없으니까 서핑을 하다가 친구가 오면 그때 만나는 거지. 파도가 있으니 지루할 틈도 없을테고. 비밀 이야기가 필요하면 수평선 쪽으로 패들링해서 사라지면 되는데. 나는 이미 글렀네. 내가 아이를 낳게 된다면 그 아이에겐 이런 삶을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전 10화 쌍수 안해서 다행이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