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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하연 Sep 20. 2022

맥주 펜팔


<수집한 맥주들>


9월의 삿포로는 맥주 축제가 한창이었다.



여행에서 길을 걷다가 우연히 마주친 거대한 천막 안의 사람들은 동네잔치라도 열린 듯 저마다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천막 옆에는 푸드트럭이 줄 지어 있었다. 우연히 만난 축제에 우리의 발걸음은 원래의 목적지를 잊고, 그곳으로 향했다.

푸드트럭을 한 번 살펴본 후, 소시지와 치킨과 팥빙수를 시켰다. 그리고 엄선해서 고른 맥주를 들고 자리에 앉았다. 시원한 바람이 온몸을 만지며 스쳐 지나갔다. 음악과 사람들의 대화가 어우러져 흥겨움을 더했다. 가을의 여행지, 그리고 오후 4시.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완벽했다.


우리는 서로의 눈을 마주치며, 컵 안에 놓인 하얀 설원을 꿀꺽꿀꺽 마셨다.


처음 가 본, 맥주 축제에서 인상적이었던 건 돌잔치 같은 행사였다. 입장할 때 번호가 적인 종이 표를 주었다. 이게 뭘까? 싶었는데 한 참 음식을 먹고 있으니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았다. 아까 나눠 준 종이의 번호를 부르고, 당첨되는 선물을 주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종이의 용도를 알지 못한 채, 한 장을 잃어버렸다. 추첨의 시간이 다가오자 모두가 사회자의 발표에 귀를 기울였다. 우리도 내심 기대를 했다. 드디어 숫자가 불렸고, 한 남자가 일어섰다. 일어를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모두 웃는 것으로 보아 재치 있는 소감을 펼치는 것 같았다. 모두가 아는 사람 같았다.

아니, 그 순간만큼은 맥주로 하나 된 가족이었다.


맥주를 사이에 놓고 저마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다. 서로를 보며 웃는 미소가 반짝였고, 테이 블 위의 노랑 맥주도 윤슬처럼 반짝거렸다. 그 틈에 끼어 있는 우리도 저절로 행복해졌다.

우리에게도 존재하는 일상이었지만, 이방인의 눈으로 보고 있으니 영화 같은 장면이었다. 나도 삿포로에 있는 친구를 불러내 한잔하고 싶었다. 그들의 언어로 다이빙하고 싶었다.

   

비록 그곳에는 친구가 없었지만, 한국에는 맥주 친구가 있었다.


맥주는 디자인도 예쁘고, 매 시즌 새로운 맥주가 출시되어 수집하기 좋은 것 중 하나다. 주위에 맥주를 마시는 사람은 많았지만, 맥주를 기록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맥주수집을 SNS에 기록하자, 저절로 나의 취미가 광고가 되었다. 친구는 내가 하는 맥주수집 이야기를 자기 남편에게 전했다. 친구는 맥주를 마시지 않지만, 남편은 새로운 맥주가 나오면 늘 맛을 보는 애호가였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를 만나는데, 종이가방에서 책과 맥주를 꺼내 내게 건넸다.      


“책은 내 선물이고, 이 맥주는 우리 남편 선물. 너 만나면 이거 주래.”     


뜻밖의 선물이었다. 그날 이후, 친구 남편과 맥주 펜팔이 시작되었다. 임산부의 마음은 임산부가 안다고,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은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이 알았다. 내가 놓친 맥주를 챙겨 받는 날은 너무 행복했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딱 맞는 청바지를 입는 즐거움이었다. 친구를 만나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맥주 친구가 준 맥주들도 쌓여갔다. 우리의 황금빛 우정은 노을처럼 진해져 갔다.     


“이거 하연이가 먹어 본 건지 모르겠는데, 이번에 새로 나온 거니까 갖다 줘.”


“내일 하연이 만나? 그럼 나 편의점 가서 맥주 사야 하는데….”     


패키지가 예쁜 MOA 맥주 빨강과 파랑을 사서 하나를 친구 편에 보내면, 다음번 만남에는 ‘어쩌라거’ 맥주를 받았다. 여름휴가를 떠올리는 맥주의 그림이 예뻐서 두 개 중 하나에 리본을 묶어 친구에게 보내기도 했다. 어떤 날은 ‘맥아, 더’를 보내고, 어떤 날은 ‘기술의 상징 금성 맥주’를 받으며 동시대의 추억을 떠올렸다.



선물 받은 첫사랑 맥주(직접 찍은 사진)




그가 준 맥주 중 가장 예뻤던 것은 빨강 색 안에 작은 하트가 그려진 ‘첫사랑’이라는 맥주였다. 날이 갈수록 맥주를 고르는 안목도 늘어갔다. 비슷한 종족을 만난 것만으로도 신남은 2배가 아닌 4배로 커졌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취미 중 맥주수집이 취미라니…….


친구와 오랜만에 만나 일상을 나누고, 못 본 동안 발견한 예쁜 엽서와 책, 화장품을 선물하는 일이 많았다. 친구는 어느 날부터인가 남편(맥주 친구)의 선물과 자신의 선물에 대한 나의 반응이 다르다고 했다. 책 선물을 받을 때의 내 반응은 다소 심심한데, 맥주 선물을 받을 때는 돌고래 소리가 난다고 했다. 그리고 헤어지는 길에는 꼭 이렇게 말한다고 했다.     


“맥주 잘 마실게. 남편한테 고맙다고 전해줘.”     


나도 모르는 리액션이었다. 맥주선물이 화장품, 책, 양말 선물보다 더 좋았던 모양이다. 그렇게 온도 차가 달랐다니…. 물론 친구의 선물들도 고맙고 좋았지만, 새로운 맥주 선물을 받으면 마음에서 거품이 콸콸콸 넘쳐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모르는 맛을 맛볼 생각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제보받아 구입한 맥주(직접 찍은 사진)




아이러니한 건, 내 맥주 친구가 군대에 있는 것도 아닌데, 한 번도 얼굴을 마주하고 맥주를 마셔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맥주 친구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충만했다.


수집은 뜻밖의 친구를 만들어 주었다. 좋아하는 마음은 보이지 않지만, 울려 퍼져 서로에게 가 닿았다. 무언가를 좋아한다면, 좋아한다고 말해라. 그러면 끌어당김의 법칙으로, 어디선가 같은 마음을 가진 친구가 나타날지도 모른다.


또는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 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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