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빛과 그림자 일기

by 하하연

< 나무와 그림자 >


변은경


땅에 누워만 있던 내 그림자가

일어섰어

나랑 하루 종일

마주 보게 됐지

바람에 흔들리는 내가

꽤 괜찮아 보여

해가 뜨는 내일을 기다리는

버릇도 생겼지 뭐야

그게 다 내 앞에

높다란 벽이 생기고부터야



<1센티미터 숲 / 문학동네>


고요하기만 했던 시간에 작은 움직임이 생깁니다. 창밖의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줄도 몰랐는데, 집 안에 슬며시 들어온 그림자가 자신의 존재를 알리듯 춤을 춥니다. 오후가 되면 그림자 덕분에 친구가 놀러 온 듯 고요한 공간이 활기를 띠기 시작합니다.


어느 날은 방문을 열었다가 흐릿하게 일렁이는 빛을 발견하고 ‘와’하고 탄성을 내뱉었습니다. 파도를 보는 듯 움직이는 빛이 아름다워서 한참을 넋 놓고 바라보았죠. 가만히 바라보다가 순간의 빛과 그림자를 간직하고 싶어서 사진을 찍으려고 하면 그 빛은 사라졌습니다. 빛과 그림자는 내가 만나고 싶다고 해서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더 여운이 오래 남았습니다. 예고 없이 찾아와 마음을 흔들고 가는 그림자. 그 몽롱함이 좋았습니다. 지금 반갑게 맞이하지 않으면 곧 떠날 것을 알기에 그림자를 만나면 진하게 눈길을 주었습니다.


집뿐 아니라 밖에서도 그림자는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평소라면 컬러풀한 꽃을 보며 감탄했을 텐데 어느 날부터인가 바닥에 떨어진 회색 그림자에 더 눈길이 갔습니다. 살랑살랑 나비처럼 움직이는 그림자가 그림이었죠.


햇살이 비추는 날이면 그림자를 만나러 산책을 갑니다. 동네의 하천을 따라 도서관을 가다 보면 다리 밑을 지나는데, 그곳의 의자에 앉아 멍하니 냇물을 바라봅니다. 쉬지 않고 흐르는 물소리를 듣기도 하고, 오리들이 부지런히 먹이를 찾는 모습도 정겹습니다. 어떤 날은 여름에 만나는 눈사람 같은 백로가 찾아오기도 합니다. 다리 밑에 앉아 있으면 거리의 소란스러움으로부터 멀어지고 다른 세상으로 들어서는 기분이 듭니다. 빛은 사라지고, 그늘이라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곳. 고개를 들면 천장에 비친 햇살 무늬를 볼 수 있습니다. 냇물의 물이 흐르면 볼 수 있는 윤슬과는 또 다른 느낌의 투명함입니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어두운 밤하늘의 오로라를 바라보듯 어두운 다리 밑에서 천장에 비친 물결 그림자를 바라봅니다. 그 빛을 보며 보석이 아름다운 건, 빛을 품고 있어서라는 생각도 합니다.


빛을 만난 순간들을 모아 기록했어요.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방 천장에 다섯 개의 빛줄기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순간. 도서관을 나올 때, 귀여운 동그라미가 벽에 그림자로 새겨진 순간, 커튼에 비치는 화분의 이파리. 와인잔을 통과하며 여러 겹의 무지개 원이 생겼던 식탁 등. 빛과 그림자를 만나는 순간은 다양했습니다. 사진기록으로 모아놓고 보니 한 편의 서정시 같더군요. 그림자는 일상 속 메마른 감정을 촉촉하게 해 줍니다. 때로는 온몸을 나른하게 합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갑자기 등장하는 빛을 관찰해 보세요. 잠 깐 뿐인 황홀함을 스치질 않길 바랍니다.



* 기록해 볼까요? 빛과 그림자 채집

눈앞의 등장한 그림자는 나를 찾아온 미술관. 빛과 그림자가 사라지기 전에 사진을 찍거나 동영상으로 남겨보세요. 세상에서 가장 평온한 장면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keyword
이전 12화낙엽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