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시간을 지나오는 내내, 실패를 수집하는 사람처럼 살았다. 대체 그딴 걸 뭐하러 모으고 살았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나도 모으고 싶어서 실패를 모은 게 아니다.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까를 열심히 고민했는데 어쩌다보니 선택하는 족족 잘못된 길이거나 막다른 길이었을 뿐이다. 무려 9년이란 시간동안 방송국과 회사와 대학을 떠돌아다닌 게 절대로 의도한 바는 아니라는 거다.
그렇게 사는동안 어땠냐? 당연히 말도 못 하게 힘들었다. 돈이 없는 건 그렇다치더라도 풍랑에 이리저리 떠밀리는 난파선처럼 살다보니 자존감이 쪼그라들다 못 해 소멸할 지경이었다. 나처럼 이리저리 헤매던 친구들의 삶이 하나둘 안정되어 갈 때까지 나의 방황은 끝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유독 나에게만 인생이 야박하게 구는 것 같았다.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은 결국엔 성공한 인간들이 하는 배부른 소리라고 생각했다. 실패가 연속되는 인생을 살아내는 당사자는 이렇게 죽을 맛인데! 그래서 사는 게 재미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런데 어느날, 똑똑하고 돈도 잘 벌고 배에 복근까지 가지고 있던 애인이 진지하게 물었다.
"자기는 사는 게 재미가 없어? 왜?"
"자기는 사는 게 재미있어? 대체 뭐가 재미있어?"
"일하는 것도 재미있고, 너랑 만나는 것도 재미있고, 운동하는 것도 재미있고, 다 재미있는데?"
손가락까지 접어가며 재미있는 일을 읊어대는 그를 보며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가까이서 지켜본 그의 인생에도 재미없는 구석이 꽤 많았다. 전날만해도 거래처 사람이랑 전화로 한 시간을 싸우고, 이놈의 회사 때려친다고 하는 걸 내 귀로 똑똑히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조차 재미있다고 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반짝이는 인생의 비결을 엿본 느낌이었다. 저런 인간들이 똘똘하게 일도 잘 하고, 복근도 만들면서 사는 거구나.
나와 만나는 게 재미있다던 그의 말은 사실이 아니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내게 이별을 통보했다. 좋아한다고 죽어라 쫓아다닐 때는 언제고 어찌나 차갑게 헤어지자고 하는지 이별 후에 한동안 맘고생을 좀 했다. 하지만 그 남자 덕분에 나는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맞게 되었다. 일단 사는 게 재미없다는 타령부터 멈췄다. 그동안 내게 재미없는 일만 생긴 건 사는 게 재미없다는 말을 반복하는 방정맞은 입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러자 내 인생을 촘촘히 메운 실패 퍼레이드가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수없이 많은 실패를 겪어내긴 했지만 어쨌든 나는 매번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데 성공했으니까. 방송작가로 사는 데 실패했어도 그 다음에 회사원이 되는 데는 성공했고, 회사에서 생고생을 하다 뛰쳐나왔지만 또 그 다음 진로를 향해 나아가는 데 성공했다. 실패의 연속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인생은 다르게 생각해보면 성공의 연속이기도 했던 거다.
게다가 알알이 모은 그간의 실패 속에서 제법 건질 게 많았다. 실패의 한복판에 있을 때에는 눈물콧물 쏙 빼며 사느라 몰랐는데 지나고나서 돌아보니 분명 얻은 것들이 있었다. 최저시급도 못 받으며 일하던 방송국에서 나는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확실히 알았다. 이딴 걸 내가 왜 배워야하는 거냐고 IT회사에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들었던 컴퓨터 교육 덕분에 지금 직장에서는 '엑셀 좀 하는 여자'로 통한다. 비정규직 작가와 백수와 회사원과 늦깎이 대학생 등으로 카멜레온처럼 변신하면서 살아온 다양한 경험은 작가의 꿈을 꾸는 지금, 글감의 노다지가 되어주고 있다. 어찌나 다양하게 엎어지고 깨졌는지 써도써도 끝이 없다. 이걸 좋아해야 할 지 슬퍼해야 할 지 모르겠다.
핀란드에서는 매년 10월 13일을 '실패의 날'로 정해놓고 서로의 실패를 축하해준다고 한다. 각자의 실패를 공유하고, 그 실패에서 배운 것들을 나누며 다음에 찾아올 성공을 기대한다는 것이다. 온갖 실패를 겪어내고 지금에 이른 나는 과연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까? 여전히 내 삶은 성공과 멀어보인다. 하지만 울며불며 살아온 날들에서 얻은 것들을 바탕으로 적당히 행복하게 살고 있는 건 틀림없다.
여전히 나는 실패를 수집하며 산다. 최근에는 글쓰기에서의 실패를 차고넘치게 모으는 중이다. 몇 년 전부터 작가가 되고 싶어서 여기저기 문을 두드리고 있는데 잘 안 된다. 글로 돈을 벌어보겠다고 공모전에도 많이 응모했지만, 올해 내가 글로 벌어들인 소득은 달랑 5만원이다. 1등 상금이 500만원인 식품회사의 에세이 공모전에 응모했는데 이름도 깜찍한 '사랑상'을 받는 데 그치는 바람에 그 회사의 식품들을 살 수 있는 포인트를 5만점 받았다. 500만원을 꿈꾸며 쓴 글이 라면과 케찹과 옥수수 통조림 5만원 어치가 되어 돌아왔다. 글을 써서 얻게 된 라면 덕분에 한동안 라면을 사지 않아도 되서 좋았지만, 글을 써서 라면을 벌었다고 생각하면 너무 웃기다.
이렇게 모은 실패들은 나중에 무엇이 되어 돌아올까? 정부보조금을 받으며 카페에 앉아 글을 쓰다 해리포터로 대박을 터뜨린 조앤.K.롤링처럼 대박을 터뜨려보고 싶기도 하다. 한번 태어난 인생 기깔나게 살아봐야 하지 않겠나! 내가 쓴 글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너무 잘 팔려서 돈방석에 앉고... 상상만 해도 황홀하다. 그런 기분좋은 상상 덕분에 잠순이가 꼭두새벽에 일어나 키보드를 두드릴 수 있는 거겠지. 하지만 내가 쓰는 글은 당연히 조앤.K.롤링의 발끝에도 못 미칠 거고, 내가 그녀만큼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은 로또에 맞는 것만큼 낮을 것이다. 나는 글을 쓰며 앞으로도 크고 작은 실패들을 반복할 게 분명하다.
하지만 자잘한 실패 뒤에 선물처럼 주어지는 작고 귀여운 성공들도 제법 기쁘다. 그게 비록 5만원어치의 성공이라 할지라도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일을 해내기 위해 도전하며 사는 게 꽤나 재미있다. 한때는 수없이 엎어지고 깨지는 삶이 두려웠지만 이제는 실패를 만나도 많이 서운해하지 않을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일을 찾아가기 위해 몇 번 넘어지는 일쯤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