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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꼼지 Oct 22. 2022

스물여덟, 다시 고3이 되었다.

  누군가 나에게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언제로 돌아가겠느냐?" 묻는다면 나는 십대로 돌아가고 싶다. 한 열다섯살 쯤으로 돌아가 친구들이랑 미친듯이 놀고 싶고, 어릴 때에만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해보고 싶다. 하지만 탱탱한 피부와 무한한 체력, 그리고 숱 많은 머리를 돌려준다고 해도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때가 있는데 그게 바로 고3 이다. 어른들은 고3 아이들에게 딱 1년만 죽었다 생각하고 공부하라고 했지만 펄떡펄떡 살아움직이던 열아홉의 나는 죽었다 생각하고 공부만 는 게 무 힘들었다.


  그런데 스물여덟의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스스로 다시 고3이 되었다. 대부분의 친구들이 취직을 하고, 누군가는 결혼을 하던 그 나이에 수능을 봐서 대학 다시 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9년만에 다시 보는 수능은 EBS를 보며 집에서 혼자 준비했다. 재수학원에 다니거나 인터넷 유료강의를 듣는 방법은 아예 선택지에 넣지 않았다. 회사에 다니며 모아놓은 돈으로 공부도, 생활도 해결해야 하니 돈을 아껴야 했다. 수험생이 되었다는 이유로 그 나이부모님에게 휴대폰 요금 따위를 내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회사를 때려치고 혼자 수능공부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 사람마다 "지인짜? 혼자 할 수 있겠어어어?" 하며 놀란 토끼눈을 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약간의 믿는 구석이 있었다. 국문학 전공과 다독으로 다져진 국어실력, 그리고 취업을 위해 공부해둔 영어실력. 태백산맥 10권을 3일만에 완독하던 실력을 수능에서 발휘해보기로 했다. 토익공부를 하다가 수능영어로 돌아와보니 고3때는 그토록 어렵던 수능 영어도 해 볼만 했다.


  문제는 수학이었다. 국어와 영어는 어른이 되면서 실력이 좋아졌는데, 수학은 머릿속에서 Delete 버튼을 누른 것처럼 모든 게 사라져있었다. 인수분해와 미적분을 해냈던 과거가 전생처럼 느껴졌다. 졸업과 동시에 내다버렸던 <수학의 정석>을 다시 샀다. 내 손으로 이 지긋지긋한 책을 다시 사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사회도 의외의 복병이었다. 실력을 체크할 겸 수능 기출문제를 풀어보았는데 반타작도 못했다. 9년이라는 세월은 공부한 걸 다 잊어버리기에 충분한 시간었으니까. 게다가 그 사이에 출제경향이 많이 바뀌어있었다. 예전에 비해 훨씬 세세한 부분까지 공부해야 문제를 풀 수 있었다.


  오전에 느지막히 일어나 밥을 먹고 밤 늦게까지 공부하는 단조로운 생활이 시작되었다. 열아홉살 때 하던  스물여덟이 되어 또 하고 있으려니 종종 헛웃음이 났다. 하지만 고3때와 똑같은 공부를 하고 있어도 달라진 건 있었다. 그 때는 공부하다 힘들면 친구들과 떡볶이를 사먹으러 나갔는데, 어른이 된 나는 문제를 풀다 짜증이 나면 맥주를 마셨다. 나이가 들어서 머리가 안 돌아가는건가, 머리를 쥐어뜯다가 시원한 맥주를 한 캔 들이켜면 안 풀리던 문제가 풀리기도 했다. 다만 맥주를 마시면서 공부고 있는 딸을 보면 엄마 입에서 "미쳤어?"라는 말이 또 나올 확률이 높으니 스트레스를 푼답시고 꽐라가 되는 일 없도록 조심해야 했다.


  공부를 시작하고 두어달쯤 지나 6월 전국모의평가에서 교대 근처에도 못 갈 점수를 받았다. 예상대로 수학과 사회 점수가 엉망이었다. 아직 전체 진도를 마치지 못 한 탓이라고, 공부를 다 하기만 하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적당히 열심히 공부했다. 스트레스 해소 명목으로 자주 나갔다. 여름에는 남자친구랑 바닷가에 다녀오고, 수능이 100일 남았을 때는 친구들이 사주는 백일주도 거하게 얻어먹었다.


  그런데 모든 과목을 한번 다 훑어보고 들어간 9월 전국모의평가에서도 말도 안 되는 점수를 받았. 히 사회가 심각했다. 그렇게 점수가 낮다는 건 나의 공부가 너무 헐렁했거나 방향을 잘못 잡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 점수 그대로라면 교대는 죽었다 깨나도 못 갈 게 확실했다. 등골이 오싹했다. 공부한답시고 회사까지 때려쳐놓고 맥주나 퍼마시다 재수를 하게 된다면... 그건 너무 끔찍한 이야기였다.


  수능을 두 달 앞둔 그 때, EBS에서는 수능 총정리 강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시기상으로는 총정리를 시작할 때가 맞았다. 하지만 나는 뭘 정리할 때가 아니었다. 놓친 게 뭔지 알아내려면 처음부터 다시 공부를 해야했다.


  그래서 3월부터 EBS에서 진행된 모든 사회강의를 다시 듣기 시작했다. 사회 네 과목에서 들어야 하는 강의가 160개가 넘었다. 벼랑 끝에 매달린 심정으로 하루에 8시간씩 강의를 듣고, 잠자는 시간만 빼고 공부를 했다. 제일 많이 들었던 날은 12시간까지 들어봤는데, 눈을 감아도 강사의 얼굴이 머릿속을 떠돌아다녔다. 그래도 죽었다고 생각하고 공부만 했다. 스물아홉에도 이 짓을 또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두 달을 내달리고 수능 고사장에 들어갔다. 1교시 국어는 무난하게 잘 봤다. 그런데 2교시 수학시험이 너무 어려웠다. 한번도 접해보지 못한 유형의 문제를 풀며 입이 바싹 마르고, 속이 타들어갔다. 잘 모르겠는 문제는 찍고 지나갔는데도 마지막 페이지의 네 문제는 읽어보지도 못하고 시험시간이 끝나버렸다. 뺏기듯 답안지를 내며 눈앞이 캄캄했다. 정신이 없어서 답안지에 이름도 안 쓰고 있다가 감독관한테 지적을 받고 이름을 써서 냈다.

  

  수학 시험을 망치고는 점심시간에 밥도 굶은 채 엎드려 있다가 나머지 시험을 보았다. 3교시 영어는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4교시 사회가 또 난리였다. 시험을 마치고 고사장을 빠져나오는데 다리에 힘이 풀려서 걸을 수가 없었다. 망한 게 틀림없었다.


  그런데 뉴스에서 역대급 불수능이었다는 보도가 쏟아졌다. 이전 해의 수능이 너무 쉬워서 변별력이 없었던 것을 반영한다는 게 난이도 조절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내 주변에는 수험생이 없어서 몰랐는데 뉴스 자료화면마다 울고 있는 고3들을 보니 나만 어려웠던 건 아닌 것 같았다.


 한달뒤, 수능성적이 나오자 불수능이었다는 보도는 사실로 드러났다. 그 해 수능 시험에서 수학을 다 맞은 사람은 전국에 95명 뿐이었다. 마지막 페이지에 손도 못 댔지만 내 수학성적은 잘 본 축에 속했다. 교대 두 군데에 지원하고 얼마 후, 두 군데 모두에서 합격통지를 받았다. 기쁘다기보다는 다행스러웠다.

 

  합격의 기쁨도 잠시, 두번째 대학생활을 시작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부터 구했다. 첫번째 대학의 등록금은 부모님이 내주셨지만, 두번째 대학은 내 스스로 해결해야 했으니까. 교대 4학년때는 임용고시를 준비하느라 일을 하지 못 할테니 그 때 쓸 돈까지 마련해두려면 미리 돈을 많이 벌어야했다. 갓 수능공부를 마친 따끈따끈한 머리로 동네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두번째 대학에 입학했다. 아홉살 어린 동기들과의 대학생활이 그렇게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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