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육아휴직이 끝날 무렵, 우리 부부는 밤마다 마주앉아 고민했다. 한 명은 벌고 한 명은 아이를 돌보던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면, 아이는 누가 돌볼 것인가.
제일 먼저 떠오른 건 어린이집이었다. 하지만 15개월짜리 딸을 어린이집에 보내자니 자꾸 망설여졌다. 돌이 지나도록 말이 트이지 않아 지나가는 강아지한테도 "아빠"라고 하는 아이를 남의 손에 맡겨도 될까. 적어도 어디가 아프다, 무슨 일이 있었다는 말이라도 할 수 있을 때 어린이집에 보내고 싶었다.
내가 육아휴직을 연장하거나 남편이 휴직의 바통을 이어받는 것도 무리였다. 나의 육아휴직 1년으로 이미 통장이 밑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아이와 셋이 모여앉아 사이좋게 손가락을 빨 게 아니라면 어떻게든 둘 다 돈을 벌어야 했다.
그때, 엄마가 구원투수로 등장했다. 남에게 맡기기엔 아직 아이가 너무 어리다며 본인이 돌봐주겠다고 하셨다. 황혼육아의 비율이 60%를 넘는다는 요즘, 나의 엄마도 손녀 육아에 뛰어들게 된 것이다. 대신 한 가지 조건이 붙었다. 아이를 엄마 집에서 돌볼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엄마는 나의 산후조리를 도와줄 때, 우리 집에서 함께 살았던 한 달이 몹시 힘들었다고 했다. 본인 살림이 아닌 데서 살림을 하는 게 힘들었고, 낯선 동네에서 시장 하나 마음대로 못 보는 것도 답답했다고 했다.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육아는 장기전일테니 어떻게든 엄마가 편하게 아이를 돌봐주실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다시 머리가 아파졌다. 우리 집에서 친정까지는 차로 안 막혀도 30분, 출퇴근시간에는 한 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다. 매일 아침 아이를 맡기고 저녁에 데려오는 것도 무리, 운전을 못 하는 엄마에게 출퇴근을 해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무리인 상황이었다. 아이를 낳은 친구들이 왜 다들 부모님 곁으로 이사하는지 그제야 이해했다. 뒤늦게라도 친정 근처로 이사가는 걸 고민해 보았지만 이번에도 그놈의 돈이 발목을 잡았다.
결국 딸은 평일을 할머니 집, 주말을 우리 집에서 보내는 두 집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일요일 밤이 되면 할머니 집으로 가서 살다가 금요일 저녁에 우리 집으로 온다. 엄마에게 24시간 육아를 맡기기엔 죄송해서 나도 평일엔 딸을 돌보며 친정에서 지내기로 했다. 온가족이 세트로 친정에 얹혀 살 수는 없었으므로 남편과는 자연스레 주말부부가 되었다.
결혼한 지 2년만에 다시 엄마와 동거를 시작하며 헛웃음이 났다. 결혼을 늦게 한 나는 서른일곱이 될 때까지 엄마와 함께 살았다. 성인이 되고도 부모님과 오래도록 함께 산 사람들은 다들 알테지만 그건 부모와 자식 서로에게 몹시 부대끼는 일이다. 그래서 결혼을 하면 꼭 부모님과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 살리라 다짐했고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에 신혼집을 얻었다. 그런데 결국 그 때문에 엄마와 다시 함께 살게 된 것이다!
기가 막힌 건 엄마도 마찬가지였을 것 같다. 기껏 결혼시켜 내보낸 딸이 자식까지 데리고 돌아왔을 때 엄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반갑고 기쁘다기보다는 좀 심란하지 않았을까 싶다. 2022년에 실시된 한 통계조사*에 따르면 손주 육아에 참여하는 조부모들의 72%가 맞벌이 자녀를 돕기 위해 비자발적으로 손주 육아에 참여했다고 한다. 엄마도 나의 복직을 돕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육아에 참여하기로 선택한 면이 없지않을 것이다. 그런데 모녀가 방까지 하나 차지하고 월화수목금을 살게 되었으니, 분명 속으로는 '아이고, 내 팔자야.'하며 한탄도 했을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손녀 육아는 엄마의 일상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나와 동생이 모두 결혼해서 나가고 여유로워졌던 집에 기저귀와 장난감과 물티슈가 그득그득 쌓였다. 아빠가 출근한 후 엄마 혼자 보내던 고요한 시간들은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를 분주하게 쫓아다녀야 하는 시간으로 바뀌었다. 조금만 눈을 돌리면 베란다의 화초 잎을 죄다 뜯어놓고, 욕실에 기어들어가고, 땅에 떨어진 걸 주워 삼키는 아이를 돌보면서 엄마는 많이 웃었지만, 그만큼 많이 늙었다. 젊은 내게도 버거운 육아가 환갑을 넘긴 엄마에게 쉬울 리가 없었다.
그래서 딸이 두 돌을 넘기자마자 어린이집에 보냈지만 코로나가 터지면서 일이 꼬였다. 오랫동안 어린이집이 문을 열지 못했고, 문을 연 후에도 긴급보육으로 돌아갔고... 뭐 그 이후의 상황은 모두가 알듯 아사리판이었다. 같은 반에 확진자가 나와서, 열이 나서, 코로나 단계가 심각해져서 아이는 수시로 어린이집에 가지 못했고, 그 시간동안 육아는 오롯이 엄마의 몫이었다. 엄마가 안 계셨으면 그 시간들을 어떻게 버텼을지 상상하다보면 아득해지곤 한다. 열이 나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낼 수도, 직장에 데리고 출근할 수도 없으니 하루하루 연차로 버티다가 그것도 불가능해진 어느 날, 홧김에 일을 그만뒀을지도 모른다.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었다. 그런데 엄마 밑에서 자랄 때보다 엄마의 도움이 간절하다. 이건 아무래도 너무 이상한 상황이었다.
나만 이런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면 일하는 엄마들의 상황은 다들 비슷했다. 친구 K는 아이를 낳자마자 친정과 같은 단지로 이사해서 어머니의 도움을 받고 있다. 아들이 하원하고 할머니 집에서 놀다가 저녁까지 먹을 때쯤에야 K는 집에 도착한다. 야근과 출장이 잦은 친구 O는 아예 친정에 아이 둘을 맡겨놓았다. 어머니가 평일에 아이들을 돌봐주시면 O는 주말에 친정에 가서 2박3일짜리 육아를 한다. 등하원도우미의 도움을 받으며 씩씩하게 연년생 아들들을 키우던 친구 L도 코로나 때 결국 백기를 들었다. 학교가 문을 닫고, 아이들의 등교가 들쑥날쑥해지자 등하원도우미만으로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L의 아들들은 충청도에서 할머니와 살며 코로나 시기 3년을 보냈고, L은 주말마다 서울과 충청도를 오갔다. 부모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일과 육아 사이에서 대환장파티를 벌이다가 우리 중 누군가는 일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이 시대의 딸들이 일을 하며 아이를 키울 수 있는 가장 큰 공신은 단연코 부모님, 그 중에서도 어머니들이다.
밭일보다도 힘들다는 육아에 엄마가 선뜻 참여해주신 덕분에 나는 오늘도 잘 출근했다. 내가 컴퓨터를 켜고, 모닝커피를 한 잔 마실 때쯤 엄마의 육아가 시작된다. 머리를 양갈래로 묶어달라는 둥, 공주 원피스가 입고 싶다는 둥 요구사항이 많은 손녀를 어르고 달래 유치원에 보내고 나서야 나의 엄마는 커피 한잔 마실 수 있을 것이다. 아이가 유치원에 가 있는 동안 친구분들 만나서 바람도 쐬시고 하라 해도 엄마는 고개를 젓는다. 아이가 없을 때 해치워야 할 일이 산더미라고, 청소하고 반찬 한두 가지 만들고 나면 금세 하원시간이라고.
집안일하다가 밥 먹는 것도 종종 잊어버린다는 엄마를 보면 안쓰럽고,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뒤엉켜서 마음이 복잡해진다. 하지만 남들에게는 살가운 소리도 잘 하면서 엄마에게는 무뚝뚝하기 짝이 없는 나는 엄마에게 다정한 말 한 마디 하는 게 그렇게 어렵다. 그저 엄마가 모닝커피와 함께 드실만한 빵을 사다 내밀며 "밥 드시기 싫으면 이거라도 드셔."하는 게 다다. 그러면 엄마는 "딸 덕분에 이런 빵도 먹어보네!"하며 좋아하시는데 그게 또 생각이 많아지게 한다. 누가 누구 덕분이라는 건가. 나야말로 엄마 덕분에 맘 편하게 일을 하고, 가끔은 밤늦게까지 회식도 하고 들어가는데. 엄마가 되어서도 엄마의 도움으로 매일을 무사히 살아내고 있는 나는 고작 빵 하나에 '덕분에'라는 소리를 듣는 게 민망해서 대답을 얼버무린다. 무뚝뚝한 딸이 내민 빵이 고맙다는 말, 미안하다는 말 대신이라는 걸 엄마는 알까.
* '2022 브라보 마이 라이프 황혼육아 실태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2.2%가 맞벌이 자녀를 돕기 위해 비자발적으로 육아에 참여한 것으로 나타났다. 육아를 돕는 조부모와 손주와의 관계를 살펴보면 외조무 54.0%, 친조모 27.2%, 외조부 13.2%, 친조부 5.6%로 딸의 육아를 지원하는 친정 어머니의 비율이 가장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