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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꼼지 Jun 13. 2024

딸의 딸을 키우는 엄마의 엄마

딸이 15개월이 됐을 때, 나의 육아휴직이 끝났다. 한 명은 벌고 한 명은 아이를 돌보던 시스템이 바뀌어야 할 때였다. 둘 다 돈을 벌어야 한다면 육아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제일 먼저 떠오른 건 어린이집이었다. 하지만 유난히 말이 늦어 그때까지 '엄마, 아빠, 맘마' 밖에 못 하는 아이를 남의 손에 맡길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적어도 어디가 아프다, 뭐가 힘들다는 말이라도 할 수 있을 때 보내고 싶었다. 그렇다면 휴직 연장? 그것도 우리에게 주어진 패가 아니었다. 이미 나의 육아휴직 1년으로 통장 잔고가 바닥난 상태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는 우리 부부에게 엄마가 구원투수로 나섰다. 아직 남의 손에 맡기기엔 아이가 너무 어리다며 본인이 돌봐주겠다고 하셨다. 황혼육아의 비율이 60%를 넘는다는 요즘, 나의 엄마도 환갑이 넘은 나이에 육아에 뛰어들게 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우리 집에서 친정까지는 안 막혀도 차로 30분, 출퇴근시간에는 한 시간 이상 걸린다. 매일 아침 아이를 맡기고 저녁에 데려오는 것도 무리, 운전을 못 하는 엄마에게 출퇴근을 해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무리인 상황이었다. 아이를 낳은 친구들이 왜 다들 부모님 곁으로 이사하는지 그제야 이해했다. 뒤늦게라도 친정 근처로 이사가는 걸 고민해 보았지만 이번에도 돈이 발목을 잡았다.


결국 딸은 평일을 할머니 집, 주말을 우리 집에서 보내는 두 집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일요일 밤이 되면 할머니 집으로 가서 살다가 금요일 밤에 우리 집으로 오는 거다. 엄마에게 24시간 육아를 맡기기엔 죄송해서 나도 평일엔 딸을 돌보며 친정에서 지내기로 했다. 남편과는 자연스레 주말부부가 되었다.


결혼한 지 2년만에 다시 엄마와 동거를 시작하며 헛웃음이 났다. 서른일곱이 될 때까지 엄마와 함께 살았으니 결혼 후에는 좀 떨어져 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서 친정에서 적당히 떨어진 곳에 신혼집을 구했던 건데, 결국 그 때문에 다시 엄마와 살게 됐다. 기껏 결혼시켜 놓은 딸이 집으로 돌아와 다시 방 하나를 차지했을 때, 엄마는 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딸의 딸을 키우며 엄마의 일상은 180도 달라졌다. 나와 동생을 내보내고 여유로워졌던 집에 기저귀와 장난감과 물티슈가 그득그득 쌓였다. 아빠가 출근한 후 엄마 혼자 보내던 조용한 시간들은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를 분주하게 쫓아다녀야 하는 시간으로 바뀌었다. 엄마는 귀여운 손녀를 보며 하루에도 수백번씩 웃었지만 그만큼 많이 늙었다. 젊은 내게도 버거운 육아가 환갑을 넘긴 엄마에게 쉬울 리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엄마의 부담을 덜어드리려고 두 돌 무렵부터 딸을 어린이집에 보냈다. 하지만 코로나가 터지면서 일이 꼬였다. 오랫동안 어린이집이 문을 열지 못 했고, 문을 연 후에도 긴급보육으로 돌아갔고... 뭐 그 이후의 상황은 모두가 알듯 아사리판이었다. 같은 반에 확진자가 나와서, 열이 나서, 코로나 단계가 심각해져서 아이는 수시로 어린이집에 가지 못 했다. 엄마가 안 계셨으면 그 시간들을 어떻게 버텼을지 생각하다보면 아득해진다. 열 나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낼 수도, 직장에 데리고 출근할 수도 없으니 발만 동동 구르다가 연차가 다 떨어진 어느날, 홧김에 육아휴직을 내버리진 않았을까. 엄마가 도와주시는데도 불구하고 일을 하며 아이를 키운다는 건 종종 불가능에 가까운 일처럼 느껴졌다.


나만 이런가싶어 주위를 둘러보면 다들 누군가의 도움으로 아슬아슬하게 일과 육아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친구 K는 아이를 낳자마자 친정과 같은 단지로 이사해서 어머니의 도움을 받고 있다. 아들이 하원하고 할머니 집에서 놀다가 저녁까지 먹을 때쯤에야 K는 집에 도착한다. 야근과 출장이 잦은 친구 O는 아예 친정에 아이 둘을 맡겨놓았다. 어머니가 평일에 아이들을 돌봐주시면 O는 주말에 친정에 가서 2박3일짜리 육아를 한다. 등하원도우미의 도움을 받으며 혼자 씩씩하게 연년생 아들들을 키우던 친구 L도 코로나 때 결국 두 손을 들었다. 학교가 문을 닫고, 아이들의 등교가 들쑥날쑥해지자 등하원도우미만으로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L의 아들들은 충청도에서 할머니와 살며 코로나 시기 3년을 보냈다. 부모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우리들은 일과 육아 사이에서 대환장파티를 벌이다가 누군가는 일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이 시대의 딸들이 일을 하며 아이를 키울 수 있는 가장 큰 공신은 단연코 부모님, 그 중에서도 어머니들이다.


밭일보다도 힘들다는 육아에 엄마가 선뜻 참여해주신 덕분에 나는 오늘도 잘 출근했다. 내가 컴퓨터를 켜고, 모닝커피를 한 잔 마실 때쯤 엄마의 육아가 시작된다. 머리를 양갈래로 묶어달라는 둥, 공주 원피스가 입고 싶다는 둥 요구사항이 많은 손녀를 어르고 달래 유치원에 보내고 나서야 나의 엄마는 커피 한잔 마실 수 있을 것이다. 아이가 유치원에 가 있는 동안 친구분들 만나서 바람도 쐬시고 하라 해도 엄마는 고개를 젓는다. 아이가 없을 때 해치워야 할 일이 산더미라고, 청소하고 반찬 한두가지 만들고나면 금세 하원시간이라고.


집안일하다가 밥 먹는 것도 종종 잊어버린다는 엄마를 위해 모닝커피와 함께 드실만한 빵을 사다드렸더니 "딸 덕분에 이런 빵도 먹어보네!"며 좋아하신다. 누가 누구 덕분이라는 건가. 나야말로 엄마 덕분에 맘 편하게 일을 하고, 가끔은 아이 걱정없이 회식도 하고 들어가는데. 엄마가 되어서도 엄마의 도움으로 매일을 무사히 살아내고 있는 나는 고작 빵 하나에 '덕분에'라는 소리를 듣는 게 민망해서 "제일 맛있는 빵으로 사왔으니 많이 드셔!"하고 방으로 들어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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