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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꼼지 May 30. 2024

엘리베이터가 멈춘 날, 18층에서

    아파트 엘리베이터가 갑자기 멈췄다.

    손녀딸을 유치원에 보내려고 집을 나선 나의 엄마는 예고없이 멈춰버린 엘리베이터 앞에서 머릿속이 하얘졌다. 우리 집은 18층, 유치원 버스가 오기 전까지 남은 시간은 10분 남짓이었다.


    모두가 바쁜 아침 시간에 멈춰버린 엘리베이터 때문에 계단이 소란스러워졌다. 칠순이 다 되어가는 나의 엄마와 여섯 살 딸이 꺼져버린 엘리베이터 앞에 망연자실 서 있는 동안, 27층에 사는 초등학생 쌍둥이들이 땀을 줄줄 흘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앞집 아기 아빠도 잠시 멈칫하더니 계단으로 향했다.   


    퇴근 후 옷을 갈아입으며 이 이야기를 전해듣던 나는 불길해졌다. 이야기를 하는 내내 엄마가 무릎을 두드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애랑 계단으로 내려가신 건 아니지?”

    “계단으로 가야지 어떡해. 차 시간은 다가오는데.”

    “애랑 걸어서 1층까지 가셨다고?”

    “아니. 두 층 내려가니까 도저히 못 가겠다고 주저앉더라.”

    "그래서?"

    "업었지."

    "애를 업고 1층까지 내려갔다고?"


    내가 놀라서 큰 소리를 내자 엎드려 TV를 보던 딸이 돌아봤다. 여섯 살이 되도록 계단을 무서워하는 딸은 난간을 잡고도 계단을 한 발씩 내려간다. 할머니가 손을 잡아줬다고 해도 두 층을 내려가는데 한나절이 걸렸을 것이다. 계단 중간에 주저앉은 어린 손녀딸과 시시각각 다가오는 버스 시간 사이에서 엄마가 얼마나 난감했을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를 업고 18층 계단을 내려가는 건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이다. 엄마는 평생 쓴 무릎 연골이 닳아 없어져 재작년에 수술을 받았다. 애가 없이 혼자서도 계단을 내려가는 게 무리인 사람이라는 거다. 그런 사람이 20kg가 넘는 아이를 업고 계단을 내려갔다는 이야기에 속이 상해서 나는 빽! 소리를 질렀다.


    "그깟 유치원 안 보내면 되지! 아니면 엘리베이터 고친 다음에 택시 타고 데려다주면 되잖아!"

    "그 생각은 못 했네. 늙으니까 머리도 안 돌아가는 것 같다."


    엄마는 멋쩍은 듯 웃으며 무릎을 두드리던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두들겼다. 그 때는 유치원 버스 시간에 맞춰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다고, 다행히 가 떠나지 않아 무사히 태워 보냈다고, 애를 보내고 나니 다리가 후들후들거렸다고, 다음에 이런 일이 생기면 꼭 택시를 태워 유치원에 보내겠다고 했다. 엄마에게 고생하셨다고 말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입으로는 자꾸 뾰족한 말이 나왔다. 엄마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마다 새어나오는 신음소리가 가슴을 쿡쿡 찔렀다. 아무래도 이 모든 게 아이를 맡긴 나 때문인 것 같았다.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오기 전까지 살던 집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아파트의 4층이었다. 엄마가 장을 보고, 병원을 가고, 아이와 잠깐 바람이라도 쐬려면 걸음마를 막 시작한 아이를 업거나 안고 4층 계단을 오르내려야 했다. 엄마는 진즉부터 아팠다고 했지만 엄마의 무릎이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한 건 분명 내가 아이를 맡긴 후부터였다. 수술을 받은 후 통증이 많이 줄었다고 해도 여전히 엄마는 많이 걸으면 고통스러워하고, 무리한 날이면 눈에 띄게 무릎이 부어올랐다.


    그 무릎으로 수백 개의 계단을 내려간 엄마는 자리에서 일어날 때마다 자기도 모르게 "아구구.."소리를 내다가 내 눈치를 살피 무릎을 어루만졌다. 손녀딸을 업고 계단을 내려가는 엄마의 모습을 상상하다가 가슴이 뻐근해졌다. 아이의 궁둥이를 받친 팔이 떨어질 것 같이 아팠을 텐데. 무릎이 시큰거리다 못 해 쪼개질 듯 아팠을 텐데. 등에서 흘러내리는 아이를 수십 번 추켜올리며 이 계단이 끝나주기를 얼마나 바랐을까.


    꺼져버린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던 게 나였다면 어떡했을지 생각해보았다. 아마 나는 두번도 생각하지 않고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업히기를 좋아하는 딸이 종종 업어달라고 조르지만 아이가 20kg를 넘긴 후로 나는 5분 이상 업어본 적이 없다. 조금 업어주다가도 "엄마 힘들어."하고 내려놓는다. 아이가 예쁘긴 하지만 그래도 힘든 건 힘든 거다. 


    그런데 대체 할머니라는 사람은 어떻게 자기 힘든 것도 모르고 이렇게 맹목적으로 아이를 사랑할 수 있을까? 원래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은 엄마의 사랑 아니었나? 그 위에 할머니의 사랑이 있었던 건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 속에서 허우적대다보니, 그동안 목격했던 할머니들의 말도 안 되는 사랑의 장면들이 줄지어 지나갔다. 한 친구의 엄마는 미국에 있는 손주들을 돌보기 위해 "I can't speak English(나는 영어를 못 합니다.)"라는 한 문장을 외워 미국으로 날아가셨다. 또 다른 친구의 엄마는 직장에 나가는 딸 대신 손주를 돌보기 위해 본인의 직장을 관두고 매일 버스 한번, 지하철 두 번을 갈아타고 왕복 세 시간씩 친구네 집에 출퇴근한다. 아이를 돌보기 위해 말도 안 통하는 나라에 가는 것? 자식이 일하게 하기 위해 내 일을 그만 두는 것? 먼 미래의 내가 똑같은 상황에 놓였을 때 어떤 선택을 할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는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할머니들의 말도 안 되는 사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가 그 나이가 되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내 딸이 자식을 낳아 내 앞에 대령해야 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어렴풋이 알겠는 건 엄마가 나의 딸에게 퍼부어주는 말도 안 되는 그 사랑의 뒤편에 나에 대한 사랑이 있다는 것이다. 엄마는 내 딸이 떼를 쓰고 나를 힘들게 할 때면 "엄마 힘들게 하지 마. 할미는 엄마도 사랑해."라고 한다. 고단한 몸으로 기꺼이 어린 손녀딸을 돌보는 것도 분명 딸인 나를 위하는 마음 때문이다. 그렇게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에 자식의 자식에 대한 사랑까지 더해진 마음의 크기는 대체 얼마인 걸까.


    아직도 "엄마 힘들어."를 앞세우는 깍쟁이 같은 엄마에 비해 너그러운 할머니의 사랑을 아는지, 아이도 할머니라면 죽고 못 산다. 할머니가 자기를 업고 수백개의 계단을 내려간 그날은 유난히 할머니한테 지극정성이었다. 무릎에 파스라도 붙여드리려고 다가가보니 내가 한발 늦었다. 아이는 할머니 무릎에 뽀로로 밴드를 붙여주고 "무릎아, 무릎아, 얼른 나아라!"하고 주문을 거는 중이었다. 그런 손녀딸을 내려다보며 엄마의 눈에서는 꿀이 뚝뚝 떨어졌다. 


    알콩달콩 깨가 쏟아지는 두 사람 곁에서 얼쩡거리다가 어색하게 파스를 내밀었다.

    "애 유치원 보내느라 고생하셨어."

    무뚝뚝한 나의 말에 엄마는 괜찮다고 짧게 대답한 후, 손녀딸과 물고빠는 세계로 돌아갔다. 분명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날 때는 무릎을 부여잡고 끙끙거리던 사람이 금세 여섯살짜리 아이와 깔깔 웃으며 숨바꼭질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도저히 나는 못 당해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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