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마늘빵을 먹다가 딱딱한 게 있다면서 퉷, 뱉어냈다. 아이가 씹기에 좀 단단한 부분이 있었던 모양이다. 곁에 앉아있던 엄마가 바닥에 떨어진 빵조각을 손가락으로 쿡 찍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잠시 후 아이가 씩, 웃는데 뭔가 허전했다.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입 안을 들여다보니 흔들리던 앞니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빨간 잇몸만 남아있었다.
"너 이 빠졌네! 설마 삼킨 건 아니지?"
혹시 이가 넘어갔을까봐 걱정이 되어 호들갑을 떨자 딸이 울먹이기 시작했다. 뱃속으로 이가 들어가면 수술해야 하는 거냐고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물었다. 그때, 아이가 뱉어내고 엄마가 잽싸게 버렸던 빵조각이 생각났다. 쓰레기통을 뒤집어 거실바닥에 펼쳐놓고 헤쳐 보았다. 다행히 물티슈와 머리카락과 사탕 껍질 사이에서 조그만 앞니가 발견됐다. 딸의 첫 유치는 그렇게 쓰레기통으로 사라질 뻔한 위기에서 극적으로 구출됐다.
딸은 빠진 이를 보관하고 싶어했다. 이가 흔들리기 시작할 때부터 자기는 이를 다 모을 거라고 노래를 하길래 토끼 모양 유치보관함도 진즉에 사두었다. 유치를 보관하려면 소독해서 잘 말려야 했다. 작은 종지에 과산화수소수와 물을 섞은 후 이를 담가놓았다. 혹시 아이가 만지거나 엎지를까봐 화장대 구석에 이가 담긴 종지를 올려놓고 출근했다.
그런데 퇴근하고 돌아와보니 아이의 이를 담아놓은 종지가 사라지고 없었다. 혹시나 싶어 주방으로 가보니 종지가 깨끗하게 씻긴 채, 건조대에서 말라가고 있었다. 종지를 씻어서 엎어놓을 사람은 엄마 밖에 없었다. 엄마에게 아이의 이는 어디에 있냐고 물었더니 엄마는 이를 왜 본인에게 찾냐고 되물었다. 종지에 아이의 이가 담겨있었다고 설명하자 엄마는 입을 떡 벌렸다. 화장대에 왜 종지가 있나, 이상하게 생각하며 물로 씻어버렸다는 것이다.
엄마는 황망한 얼굴로 개수대의 배수구를 뒤지기 시작했다. 희고 작은 아이의 이와 버려진 밥알이 구분이 안 되서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가며 찾아야 했다. 다행히도 배수구망의 음식물찌꺼기 사이에서 아이의 이가 발견됐다. 이에 묻은 고춧가루를 물로 헹궈내며 왜 자꾸 이를 버리는 거냐고 농담처럼 묻자, 엄마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유, 뭐가 보여야 말이지... 나는 종지에 이가 들어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엄마의 어두운 눈 때문에 아이의 첫 유치가 두번이나 버려질 뻔했던 사건은 아이의 앞니가 새로 난 지금까지 우리 가족이 즐겨 이야기하는 주제 중 하나다. 이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딸은 할미가 자기 이를 버렸다며 심통난 얼굴을 하고, 엄마는 과장된 말투로 사과를 하는 게 웃음 포인트이다.
하지만 엄마의 노안이 늘 이렇게 유쾌한 에피소드만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작은 것들 투성이라 엄마의 침침해진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엄마는 종종 작은 글씨로 쓰인 유통기한을 보지 못 하고 아이에게 날짜가 지난 음료를 먹인다. 아이에게 약을 먹일 때면 약병의 눈금이 보이지 않아 애를 먹는다. 어쩌다 아이가 마시고 난 야쿠르트병에 적힌 날짜가 이미 며칠 지난 것임을 발견할 때는 마음이 좋지 않다. 하지만 엄마에게 뭐라고 할 수도 없다. 잘 보이지 않는 사람 마음은 오죽하겠는가.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약병에 아이가 먹을 용량을 네임펜으로 표시해두는 것, 수시로 냉장고에서 날짜가 지난 음식들을 빼놓는 것 뿐이다.
내가 이렇게 소극적으로 엄마의 노안을 지원한다면, 딸은 좀더 적극적인 지원군이다. 할머니가 작은 글씨를 못 읽고 "이게 뭐라고 써있는 거냐... 돋보기가 어디 있더라?"하면 잽싸게 돋보기를 찾아다 대령한다. 글씨를 다 깨우친 후부터는 자기가 할머니 눈을 대신해 읽어주기도 한다. 돋보기를 쓴 할머니와 유치원생이 머리를 맞대고 과자의 유통기한이나 원산지 같은 것을 읽고 있는 모습을 보면 귀여워서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문제는 가족들이 도울 수 없는 곳에서 어려움을 맞닥뜨릴 경우다. 엄마는 얼마 전 카페에 갔다가 키오스크 앞에서 절망을 경험했다고 했다. 키오스크의 사용법이 낯선 것을 떠나서 일단, 돋보기가 없으니 메뉴를 읽을 수가 없었단다. 그래서 직원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주문은 키오스크에서 하셔야 해요!"하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고 했다. 엄마는 그 이야기를 전하며 "이제 돋보기 없으면 커피도 못 먹어." 하고 서글프게 웃었다.
나는 그 카페 직원이 너무 인정머리가 없는 거라고, 나이든 사람들한테 키오스크는 너무 어렵다고 화를 내며 엄마의 서글픔을 달래보려 했다. 하지만 실은 나도 속이 왕창 상했다. 노인들을 힘들게 만드는 키오스크도 속상하고, 손님에게 냉정한 카페 직원도 속상했다. 그리고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작아지는 엄마의 모습도 속이 상했다. 이렇게 엄마가 늙어서 속상하게 될 줄도 모르고, 시간이 흐르기만을 간절히 바라던 과거의 내가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아이를 키우는 동안 참 시간이 안 간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한 달, 일 년 같은 뭉텅이 시간은 그나마 잘 지나가는데 이상하게도 하루하루는 지독히 느리게 흘렀다. 딸이 처음 태어나고 혼자서 아이를 돌보던 때, 하루에도 수십 번씩 시계를 봤다. 말 한 마디 못 하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다 몇 시쯤 됐을까 싶어 시계를 보면 시간은 고작 삼십 분쯤 지나있을 뿐이었다. 그 시절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은 '아이가 언제 잘까?'였다. 아이가 자야 내가 쉴 수 있으니까. 아이가 빵긋 웃는 순간에는 세상을 다 가진듯 행복했지만, 찰나의 행복으로 버텨내기엔 육아가 너무 고단했다.
그래서 시간이 빨리 흐르길 바랐다. 얼른 시간이 흘러서 아이가 혼자 앉아주길, 걸어주길, 스스로 밥을 먹고 혼자 놀 수 있게 되길 간절히 기다렸다. 다행히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흘러준 시간 덕분에 아이는 많이 자랐다. 어느새 키가 내 가슴에 닿을 만큼 자란 딸은 혼자 화장실에 갈 수 있고, 혼자 밥을 먹을 수 있고, 혼자 책을 읽으며 놀 수도 있다. 점점 할 수 있는 게 많아지는 아이를 지켜보는 건 참 행복한 일이다.
그런데 딸을 향해 있던 눈을 돌려 엄마를 보면 꼭 아이가 자란만큼 엄마가 늙어가고 있다. 아이가 할 수 있는 게 많아질수록 엄마에게는 어려운 일이 많아지고 있다. 이제 엄마는 돋보기 없이 글씨를 읽을 수 없다. 오래 걸으면 다리가 아파 영락없는 할머니 걸음을 걷는다. 불과 몇 해 전에 찍은 사진 속의 엄마는 지금에 비해 너무 젊다. 그때에 비해 부쩍 늙어있는 엄마의 얼굴을 보면 마음이 복잡하다. 나와 함께 아이를 키우는 일이 엄마의 시계를 조금 더 빨리 돌린 건 아닐까.
하룻밤 자고 나면 그만큼 또 딸은 자라고, 엄마는 늙을 거다. 두 사람을 함께 보고 있자면 시간이 흘렀으면 좋겠는 마음과 붙잡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든다. 내게 소중한 존재가 성장하는 걸 지켜보는 건 기쁘지만, 또 다른 존재가 약해지는 걸 지켜보는 건 슬프다. 시간이 흐른다는 게 이렇게 기쁜 동시에 슬픈 일인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다.
엄마 7년차이자 사십대 중반에 접어든 나는 이제 시간의 흐름이 서글픈 사람들의 대열에 합류했다. 작년부터 컴퓨터 모니터의 글씨가 흐릿하게 보이는 게 아무래도 노안이 시작된 것 같다. 초점이 흐려지자 당장 아이의 손톱을 깎는 게 문제다. 눈에 바짝 힘을 주고 조심해서 자르는데도 저번엔 손톱 옆의 살점을 잘라 피를 내고 말았다. 물건을 어디에 뒀는지 기억하지 못 하는 증상도 좀 심각하다. 허구헌날 휴대폰과 차키와 카드를 찾느라 온 집안을 떠돌아다닌다. 내가 뭔가를 찾느라 이 방 저 방을 헤매고 다니면 엄마는 "네 나이에 벌써 그러면 어쩌니, 쯧쯧." 하면서 혀를 차는데, 그 얼굴에 어째서인지 웃음기가 들어있다. '너도 나이 드니까 별 수 없지?'하는 표정이다.
나와 엄마를 스쳐지나가며 밝은 눈과 총명함을 빼앗아간 시간은 어린 딸에게 가 닿으며 빛나는 무언가로 바뀌는 느낌이다. 아이에게는 하루가 더해질수록 반짝이는 것들이 늘어난다. 아이가 글을 깨우치고, 숫자를 이해하고, 세상의 원리를 알아가는 모습을 보면 가끔 경이롭기도 하다. 사랑을 받은 만큼 주는 법도 어느새 배웠는지, 가끔은 너무 예쁜 말과 행동으로 어른들이 피로를 싹 잊게 만든다. 이 아이를 키우기 위해 엄마와 내가 그동안 겪어낸 시간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리지만, 그 모든 순간들이 모여 이렇게 사랑스러운 생명체를 키워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뿌듯해지면서 억울한 마음이 좀 덜해진다.
그래도 엄마의 시계가 조금만 느리게 돌아갔으면 한다. 아직은 엄마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도, 함께 하고 싶은 것도 많다. 딸은 할머니가 자기 대학 가는 걸 보지 못할까봐 유치원을 졸업한 후에 바로 대학에 가겠다고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있다. 나는 이미 대학도 졸업했고, 결혼해서 아이도 낳은 터라 더 보여줄 게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엄마와 함께 하고 싶은 게 많다. 이제는 아이가 어느 정도 컸으니 조금은 여유롭게 맛있는 것도 먹고, 풍경 좋은 곳으로 바람도 쐬러 다니고 싶다. 그 모든 걸 해내려면 엄마의 시간이 조금 더 느리게 흘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