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 조금 늦은 아침에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 지하철이 한참을 안 떠난다. 내 뒤로 몇몇이 더 달려들어 타고는 안도의 표정을 짓는 걸 보면서도나는 탔으니 이제 빨리 좀 떠났으면 좋겠다는생각을 하고 있는 스스로에게 놀란다.이기심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배어있다는 걸 느꼈다.
하루에 1시간을 넘어 2시간에 육박하는 시간을 지하철로 통근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다. 용인, 수원, 양주 등등.. 지하철은 버스와는 달리 컴컴한 동굴을 달린다. 폐쇄공포.. 스트레스 정도가 과연 괜찮은 걸까? 세상은 그래서 점점 가혹해지는 것은 아닐까? 다행히 사람들은저마다의 작은 창을 들여다보여 공포를 잊는다. 뭐긴.. 요즘은 스마트폰이 99.9..%
지하철로 출근을 10년 넘게 하면서 터득한 팁이 있는데 앉는 자리가 없을 때도움이 되는 방법이다. 분당선을 서현에서 타면 복정역에 이를 때까지 계속 왼쪽 도어만 열리는데 반대편 오른쪽 문 바로 옆 허리춤까지 오는 봉에 몸을 기대어 가면 조금 편하다.
오늘도 타자마자 내가 좋아하는 위치로 향하는데 바로도어 옆자리에 외국인이 앉아 있었다. 그는 덩치도 커서 어깨와 팔이 봉 사이로 넘어오고 오늘따라 뭔가 좋지 않은 강렬한 체취를 느낄 것만 같은 거부감이 들어서가던 발길을 슬쩍 돌려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했다. 설마 티나진 않았겠지 하고 있는데 바로 다음 정거장 문이 열리면서 비슷한 짙은 초콜릿색 피부의 또 다른 외국인이 타더니 바로 내 옆으로 온다. 흠.. 오늘은 이상한 날이네 하며 그냥 단념하고 자리를 더 옮기진 않고 그냥 갔다.
적다 보니 '인종차별' 혹은 '혐오' 같은 단어들이 떠오른다. 그때의 나의 행동과 생각은 앞의 두 단어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평소 인권이나 평등에 대해 (정치만큼이나) 관심이 크지도 작지도 않았지만 무의식 중에 나온 나의 사고는 역시 편견과 선입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자각이 되어 스스로에게 또 실망을 했다.
내 자신에게 한 두 번 실망하는 것도 아니고 언제나처럼 '그래서 뭐.. 어쩌라구' 식의 무력감이 곧 뒤를 이었지만 예전과는 다르게 하나의 핑곗거리가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스스로의비판에 맞서지 않고 일단 은신하고픈 유혹을 느낀다.
코로나로 인해 외국과의 왕래가 쉽지 않던 시절부터이들은우리 곁에 와 있었을까? 물론 그리 어려운 답은 아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감당하고 있는 경제적인 역할이 커진 지가 언제인데, 이미 훨씬 전부터 와 있었을 수도 있고 생계를 위해 방역이나 격리절차쯤은 마다하지 않고 와 있을 수도 있다. 먹고사는 문제인데 왜 못하겠는가?
과거 유럽인들이 신대륙을 발견했을 때 총, 칼 보다 원주민을 더 많이 죽인 건 그들 자신의 몸으로 직접 옮겨간 바이러스였다. 총, 칼에 의한 것보다 10배에 달하는 숫자의 원주민이 전염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백신과 치료제가 흔해진 현대와는 달리 이전에는 전염병이야 말로 심각한 재난이었고 아직도 수렵채집단계에서 많이 벗어나지 못한 우리 신체는 이런 위협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피하도록 회피본능이생겼을 것이다.
인종 차별, 피부색 혐오 등과 같은 미개하고 덜 깨인 인간들에게나 부여할 수 있는 단어들은 어쩌면 이런 인간의 본능을 초월하는 지극히 현대적인 개념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구의 근원에는 나름 이유가 있을 것이다.
현대 과학과 의학의 발달로 지구상의 인간들이 서로 싫어하지 않고 차별하지 않고 호의를 품고 교류할 수 있는 개념이 겨우 태동했지만 코로나는 다시 그 근간을 흔들었을지 모른다. 만인이 평등한 지하철 안에서도 우린 얇은 마스크 한 장 너머로 다시 차별과 경계의 벽을 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하철 타는 사람 특유의 냄새가 있어.'
생뚱맞게 갑자기 영화의 한 대사가 떠올랐다. 그리고 곧 얼마 전 비보를 전한 주연 배우도 떠올랐다.
(갑자기) 우리는 왜 그를 마녀사냥 했던 것일까?
'파스타, 내 아내의 모든 것, 끝까지 간다, 나의 아저씨..'우리가 좋아했던 화면 속 그의 캐릭터 들은 어쩌면 타고나지 않으면 감당할 수 없는 단순한 연기가 아닌 것이었을지도 모른다.흔들리는 시선 성난 목소리 그러면서도 애수에 찬 눈빛.. 배역은 배우의 페르소나이다. 완벽히 맞아떨어질 때 빛을 발한다.
작품이 아닌 현실에서 그는 대체 얼마나 달랐길래 이런 비극이 일어난 것일까. 우리가 있는 그대로 그를 받아들였더라면.. 그도 우리가 바라는 것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닐 거라는 생각으로 '그래서 뭐?'하고 버텼더라면..
우리는 직업으로써의 그의 연기에 감동을 받았을 뿐이다. 그는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자신을 돌아보고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 드라마의 주인공이었을 뿐이다. 우리는 그를 소비했다. 그리고 죽음으로 이끌었다. 그가 잘못이 있다면 법이 심판할 일이고 개인사는 가족이 결정할 일임에도 불구하고이기적이고쓸데없는 오지랖이 만연한 이곳에서 아까운 배우가 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