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몸으로 일으킨 회사를 떠나, 완주한 나의 올레길
힘들거나, 아쉽거나, 마음이 아픈가요?
저도 그랬지요. 힘들고, 아쉽고, 마음 아프게 온통 지난해를 보냈지요.
느닷없이 직장과 헤어질 결심에 저의 가족도, 친구도, 직장의 동료들도 그저 놀라워 했지요.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 졌으니까요.
200주년을 바라보는 전통의 글로벌기업의 대한민국 법인장으로 승승장구한 CEO(Chief Executive Officer, 대표이사)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겠다는 소식을 전했을 그때.
12년 전, 희망 한 줄 보이지 않는 회사의 미래와 제조시설의 폐업, 그리고 구조조정의 불안감 속에 아무도 원치 않던 대표이사직을 기꺼이 수락했지요. 주변인들은 절망적 상황이라고 말릴 때 저는 바닥을 치고 새롭게 치고 오를 멋진 기회라 고집부렸지요. 그 시절 주경야독 박사논문을 마무리하고 졸업 1년을 남겨둔 시점에 대학원을 자퇴하겠다는 배수진에, 필자가 경영전략 교수가 되도록 지도했던 교수님의 아쉬움과 실망을 뒤로하고 조용히 학업을 접었으니까요. 가족과 친구들은 어려운 길로 기어코 찾아 가는 저 고집쟁이 기질이 다시 발동 되었음을 팔짱 끼며 두고 보는듯 했으니까요.
전장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맞아 가며 역전의 비즈니스 전략 케이스(Business Strategy Case)를 현장에서 내 손으로 직접 만들어 다시 돌아오겠다 약속하고 자발적 퇴학을 감행했지요. 성공의 가능성이 희박한 CEO 자리에 취임 후 몇 달의 주말 동안 두문불출하며 이순신 장군의 <7년 임진왜란 해전사>를 울컥함과 감동으로 읽고 이 장군의 21세기 수제자가 되어 보겠다는 전의를 불태웠지요. 울돌목 일자진 해상전투 전략으로 절망의 전세를 역전시킨 사건은 기적이 아닌 비전과 사명감 그리고 부활을 위한 사전 각본대로 준비한 승전보이니까요.
지속 경영을 위한 구조조정과 부활을 위한 고난의 행군계획을 세세하고 침착하게 선포했지요. 함께 행군하는 동료들과 풍찬노숙(風餐露宿, 바람 속에서 먹고 길거리에서 잠 잘 만큼 많은 고생을 겪는다는 의미)하며, 때로는 대상포진과 눈썹이 빠지는 심신의 고난 속에서도 솔선수범 전우애를 다지며 현장의 승전보들을 하나 둘 차근차근 쌓아 왔지요. CEO 취임 후 12년이 지나 이제는 고객으로부터 제법 칭찬과 경쟁사의 부러움을 받는 멋진 글로벌기업 경영자는 검투사의 옷을 벗어 던지고 설렘의 인생 2막을 열기 위하여 지난가을 아쉽고 아픈 이별을 선택했지요.
수확의 황금 들판이 보이는 카페 창을 두드리는 가을비에 귀 기울이며 아메리카노 뜨거운 커피 한 모금과 나를 돌아보는 복기의 시간을 가졌답니다. 비록 경영전략을 강연하는 교수의 꿈은 포기했지만, 승부사 CEO로 부활한 삶이 더 가치 있고 보람이 컸다고. 가을비가 저에게 말을 걸어왔지요. 그런 말을 건네준 가을비가 얼마나 고마웠는지요.
바닥을 칠 때가 새로운 시작이라 했으니, 정점을 찍고 '손뼉 칠 때 떠나라'는 말대로 글로벌 이사회에 '사-직-서' 단 한 줄의 글을 제출했지요. 바로 다음 날 9월 중순,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어 올레길 완주의 결심을 실행에 옮겼지요. 5개월간 다섯 번의 제주행 왕복 비행기를 타고, 도합 한 달 가까운 시간 동안 제주도의 스펙터클 해변과 오름을 숨차게 넘나들며 437km 올레길 완주를 감행했지요.
걷기를 시작하며 "자 이제 시작이다 새로운 내 청춘"의 슬로건을 일기장에 적었답니다. 스물셋 시절 청년인 나를 불러와 가난한 청춘의 추억과 동행하며 제주의 파도가 바람에 부딪혀 우는 소리를 들으며 한바탕 내 영혼의 씻김굿 축제의 시간을 가졌지요.
제주섬 속 또 다른 세 개의 섬 추자도, 가파도 그리고 우도의 길을 포함 27코스 437km를 걸어 내며, 발톱이 빠지고 발등이 퉁퉁 붓고 멍이 들어도 내 심신의 에너지가 점점 충만해 감을 확인했어요. 두 발로 제주도 한 바퀴를 완주한 종점은 무지개와 검은 현무암이 황홀하게 펼쳐진 해변 길 바로 같은 시작점이었지요.
"자 이제 시작이다." 여러 번 중얼거리며 시작한 시흥리 1코스의 시작점은 결국 마지막 27번째 코스의 종점이었지요. 하루의 시간도 시작과 끝이 있다면, 오늘의 시작은 어제의 끝이었고 올해의 시작은 작년의 끝이니까요. 힘겨웠던 오늘은 다시 새로운 내일로 이어질 것이고, 힘겨웠던 437km 길은 다시 새로운 437km의 길로 이어질 테니까요.
그리스의 영웅 오디세우스(Odysseus)가 10년의 전투에서 천신만고 승리를 거둔 후 또 다른 10년 동안 야망의 출발점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신산한 여정을 거쳐 가듯 437km 제주섬 한 바퀴를 두 발로 뚜벅뚜벅 한 발 한 발 걸었으니까요. 버티기 힘겨운 현실과 고난의 시간은 언젠가 막을 내릴 것이고 그 1막을 내린 청춘은 다시 새로운 2막의 도전으로 이어질 것이니까요. 청춘의 길은 연령과 시간의 개념이 아니라 태도와 도전의 올레길이 아닐까요?
새로운 도전은 다가올 두려움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마주 설 때 비로소 시작하는 것이며, 그 두려움을 딛고 첫발을 뗄 때 비로소 청춘의 길이 열린다며 바닷길과 오름길들이 저에게 속삭여 주었지요.
청춘이란 젊은 나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새 길을 찾아내는 도전자만이 가질 수 있는 완주증(Finisher Certificate) 같은 것이라며. 제주의 오렌지빛 귤과 푸른 바다를 상징하는 두 개의 깃발이 한 몸으로 펄럭이며 저에게 소리쳐 응원해 주었지요. 힘겨운 생활물가와 가파르게 오른 월세·전세에 사투하는 세상에서 돈과 명품을 갖는 것이 최고의 목표가 되어가는 시대에 저항하는 나눔의 올레길 깃발을 들고 함께 걸어가는 올레를 사랑하게 되었답니다.
올레의 새벽과 석양을 걸으며 어둠, 그늘, 눈물, 패배, 흔들림, 고독, 외로움, 치욕. 이런 단어들을 감싸고 안아 줄 수 있게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어둠과 그늘이 있는 이유는 빛이 존재하기 때문이고 눈물에는 웃음이, 패배에는 승리가, 흔들림에는 고요함이, 고통에는 환희가, 고독에는 우리가, 치욕에는 자부심이, 비움에는 채움이 기다리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아~~ 한 바퀴 돌아와 다시 만난 해변은 눈부시게 맑고 푸릅니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엔~ 인생에 투정 부리지 말자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엔~ 올레길 걷듯 걸어가 보자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엔~춤추듯 걸어가 보자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엔~그저 감사의 기도를 하자
바다보다 깊고 푸르고 감귤보다 짙은 청춘으로 재탄생한 437km 완주를 마치고, 올레는 인생 2막 새로운 내 고향으로 자연스럽게 체득했지요. 그 증거로 '올레길 후원자'가 되었고 제2의 '고향 사랑 기부자'가 되었지요.
우리 인생의 후반전은 나의 경계를 넘어 타인의 아픔과 어둠을 공감으로 채워 가는 불꽃
청춘의 화려한 축제가 아닐까요? 올레길을 개척한 자원봉사자들이 그랬듯 나의 뒤에 걸어오는 사람들에게 길을 터 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인생올레 완주가 아닐까요?
I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