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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밖엔 난 몰라 Mar 08. 2024

세상을 바꾸는 1,000원 지폐의 힘

기울어진 세상을 평평하게 만드는 1,000원의 기적


맹수처럼 으르렁대며 오르는 물가의 충격 때문인지 3월에 입춘대길을 알리는 안토니오 비발디 (Antonion Vivaldi)의 '사계'의 화사한 바이올린 소리와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의 라 프리마베라(La Prmimavera; 봄) 그림이 쉽게 떠오르지도 마음속으로 향유하기 불편한 심기의 봄입니다.

 

봄학기에 맞추어 새 책과 노트를 준비하던 습관대로, 3월의 첫 일요일 아침 낡아 가는 소장용 서적들과 만년필, 볼펜 등 젊은 날 의기양양하게 모았던 물건들이 낡은 청춘의 흔적인양하여 이것저것 분류해서 버리고 비우고 닦고 정리합니다.


필요할 때 요긴하게 쓰려고 책상 서랍과 사물함 군데군데 넣어 둔 1000원권 지폐 꾸러미를 발견하고는 잠깐 고민에 빠집니다. 인플레이션 (Inflation) 때문에 이젠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 되어가는 1000원짜리 지폐의 존재감은 물가에 반비례하여 동전 같은 푼 돈이 되어 버린 것이 사실입니다. 시대에 뒤떨어지듯 점점 멀어져 곧 유물이 될지도 모를 서랍 속 1000원 지폐들이 생의 한가운데 무대에서 슬금슬금 뒷걸음치는 내 청춘의 뒤통수를 닮은 듯한 동질감을 줍니다.  


지난주 강남역에서 동료와 생맥주 한잔 걸치고 칼바람에 옷깃 여미며 퇴근길을 걷다가 붕어빵 굽는 가게를 마주쳐 지나가다 붕어빵 하나에 1000원이라는 푯말을 보고 깜짝 놀랐지요. 아니 꽤 많이 놀랐습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동네 산책길에 운동복 주머니 속에 1000원 지폐 한 장 넣어 가면 뜨끈한 즉석 붕어빵 서너 개는 든든히 사 먹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1000원 지폐 한 장으로 붕어빵 한 개만 달라고 하기엔 꾀죄죄하고 눈치 보이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정리 정돈을 좋아하는 내 마음처럼 책상 서랍 속에도 봄의 기운을 불어넣을 겸 정리하다가 1000원 지폐 수십 장을 묶은 꾸러미를 발견했지요. 이젠 물가고로 푼돈으로 쇠락해 힘없는 1000원 지폐들을 어떻게 다 쓰고 없애 버릴까 궁리합니다. 이 글을 쓰다가 책상 위에 올려 두고 키운 서양란 화분이 눈에 들어옵니다. 작년 봄 새싹으로 분양받은 어린잎들이 일 년 새 훌쩍 자라 화분 받침대도 하나 살 겸 동네 생활용품점으로 찾아갔지요.

 


           (그림=최익준)


플라스틱 화분도 받침대도 1000원에 사고, 수채화 연습용 도화지와 물감 팔레트도 1000원 지폐 몇 장을 지불하고 샀습니다. 마침 그림을 보관하는 나무 액자도 하나 골라 프랑스 길거리 여행지를 스케칭 한 그림에 끼워 보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1000원의 지폐들이 주는 기쁨과 가치는 꽤 근사합니다.


내 청춘은 가난했지만 당당하고 빳빳했고, 1만 원권 오만 원권 지폐와 십만 원권 수표를 가진 친구들과 겨루어도 손색이 없었으며, 그들이 더 큰 지폐의 힘으로 밥과 술을 살 때 나는 '땡큐' 감사의 표시로 불과 몇천 원 하던 시집에 심금을 울리는 손 편지 한 장 써서 씨익 웃으며 예술작품을 선물하듯 그들에게 기증한 치기와 배짱이 있었으니까요.


1000원짜리 지폐 몇 장의 씀씀이로 깔끔하고 화려해진 화분과 나의 그림 액자가 어느새 춘삼월 입춘대길의 기운을 화들짝 가져다줍니다. 소유한 돈의 크기가 중요하지만 가진 돈의 사용법도 나름 가치 있음을 명쾌하게 인지합니다. 1000만 원도 어찌 사용하는가에 따라 1000원이 될 수 있고, 1000원의 사용법이 1000만 원의 기쁨을 주는 정서적 예외가 있음을 깨닫습니다. 1000원 지폐 한 장이 저에게 꽤 근사한 봄을 선물해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진영의 돈과 전체주의 진영의 독선은 양극단으로 너무나 굳건히 깔려 있고, 은하계 작고 푸른 한 점 지구 위의 세상에서 어디를 가든 돈의 격차로 인한 빈익빈 부익부가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차별이 심화하여 가는 것은 당신도 나도 어쩔 수 없는 기정사실입니다. 돈과 자산의 유무에 따라 계층 간의 이동이 날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아예 계층 이동의 사다리를 던져 포기하고 먼저 주저앉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을 굳이 통계자료가 증명하지 않아도 모두가 아는 기정사실입니다.


심장마비에 걸릴 만큼 무섭고 불안하며 미래가 보이지 않는 고물가의 시대를 우리는 벗어날 수 없음을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쓰고 남은 1000원권 지폐들을 어디에 쓸지 생각하며 십 년 전쯤 새해의 결심을 몇 가지 적어둔 수첩을 들쳐 봅니다. "봉사 기부 조금이라도 하고 살자"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옵니다. 순간 "아아~. 나라는 사람은 참으로 멍청했구나."


어깨에 단 사회적 계급장으로 목에 힘주며 아너스 소사이어티 클럽에 내 이름 석 자 올릴 정도의 금액 정도는 쾌척해야 비로소 기부라고 생각한 것은 나의 치졸하고 저급한 위선과 허영의 수준이었음을 통렬히 반성합니다. 나는 어리고 짧은 인간임을 1000원 지폐가 일깨워 줍니다.


          (사진=언스플래쉬)


진보하는 세상의 편으로 넘어가기 위해 매일 최소 1000원 이상 일상적 기부를 시작했습니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한 달에 최소 한두 번 내 몸을 직접 사용하는 봉사도 함께 시작했습니다. 지난날들을 복기해 보니 가장의 기본책임을 제법 충실하게 이행했지만 내 인생에 후한 점수와 평가를 결코 해 줄 수 없었기 때문이죠.


사회적 명성과 보이는 나를 위하여 주경야독 피 터지게 남 부럽지 않을 만큼 공부하고 이 깨물고 경쟁했습니다. 매출과 이익을 가파르게 우상향 시킨 모범납세 경영자로 인정도 받았지만, 저라는 인간은 단돈 1000원이라도 필요한 누군가를 직접 찾아가 정기적으로 체온을 전하는 따뜻한 인간이 되지 못한 점을 통렬히 반성했기 때문입니다. 자동이체 소액 기부 통장을 개설하고 나니 무력감에 빠지려던 저에게 새로운 상상력과 활력이 생겨 히죽히죽 웃습니다. 출출한 산책길 뜨끈한 1000원에 한 개 몸값 비싼 붕어 팥빵을 달게 씹으며 행복에 겨워합니다.




그리고.. 이런 상상을 합니다..  

'글을 읽는 친구와 독자 1만 명이 1000원 기부를 함께 한다면 1000만 원의 기부금이 만들어지고 한 달이면 3억, 일 년이면 36억 원의 기금이 생긴다..'  모인 돈으로 할 수 있는 것은 꽤 많습니다. 내가 스스로 그렇게 살아왔듯이, 기울어진 계층의 운동장을 조금이라도 평평하게 만들 수 있는 교육을 제공하고 돈 없어서 아침을 굶는 누군가에게 힘이 될 것이라고. 올레길을 걷고 싶어 하는 장애우가 육지에서 나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제주 푸른 바다를 바라볼 때 내가 힘껏 휠체어를 밀고 트래킹 하는 꿈을 꿉니다.


거액의 금액이 모이지 않아도 아무 상관없습니다. 이 글을 읽은 당신이 적어도 공감을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벌써 세상을 변화시키는 천 원의 세력을 지지해 주실 것이니까요!


진보도 보수도 초월하고 포용하는, 우리가 젊은 날 열망하고 꿈꾸던 혁명이 이런 것 아닐까요? 슬며시 왔다가 표 없이 사라질 짧은 인생길에 이론으로 무장하여 새 사회를 건설하기보다 누군가의 휠체어를 밀어주는 따뜻하고 힘찬 손 한 번 되어 주는 것이 우선 아닐까요? 그다음에 이론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게 정답 아닐까요?


진정한 혁명은 사회과학적 이데올로기로 시작할 수 있어도 결코 그것만으로 완성할 수 없는 것이니까요. 힘겹고 비탄스러우며 비이성적이고 정의롭지 못한 현실을 바꾸고자 하는 신념의 행동과 공생의 열정이 함께 어우러질 때 완성되지 않을까요? 봉사와 기부가 일상이 되는 사회가 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사회적 시스템을 재고해야 하지 않을까요?


나의 1000원이 내가 올라간 알프스산맥 융프라우 정상 꼭대기에 내린 작은 눈 한 송이가 되고 1000원의 송이들이 수십만 수백만수천만 눈송이가 녹아 흘러내린 냇물로 가고 그 냇물은 강물을 이루고 저 아드리아해로 흘러가 태평양의 바다에 섞여 다시 구름이 되고 비가 되고 융프라우 정상에 날리는 눈송이로 환생하는 에너지가 될 수 있으니까요.


우리는 빵 한 조각 물 한 모금 나눔으로 혁명을 완수한 예수님, 석가님, 그리고 알라의 자랑스러운 후예이자 1000원의 나눔 세력들이니까요.


          (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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