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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밖엔 난 몰라 Sep 13. 2024

추석, 고독 충만한 달빛 서사

칼 세이건이 나에게 선물한 [별들의 삶과 죽음]

젊어도 너무 젊은 날 추석 이야기입니다. 이십 대 후반의 지독히 특별하고 재미없던 추억 이야기입니다.


나 홀로 서울살이의 외로움을 보충할 만큼의 달콤한 믹스 커피가 있었고, 카세트 테이프로 들을 수 있는 음악이 있었고, 몇 달간 선을 보고 교제하던 이성과 이별한 초가을의 추석은  그야말로 내가 원하던 '방콕' (방에 콕 박힘)의 고독과 자유를 맘껏 누리는 시간이었지요.


정원이 딸린 하숙집 빌라 한 층 전체를 오롯이 나만의 공간으로 독차지하고 말겠다는 야심으로 호시탐탐 추석의 연휴를 기다리던 나에겐 모두가 고향으로 떠난 그 하숙집 한 채가 깊고 푸른 우주와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요. 봉준호 감독의 베스트셀러 영화 '기생충'에 등장하는 통창에 정원이 딸린 그런 집에 비할바는 못 되었지만,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나만의 정원과 소박한 거실이 있는 집을 아지트 삼아 며칠을 보낼 생각을 하니 꿈만 같았지요. 그때 스물아홉 살 적에.


이태리의 소설가 움베르토 에코의 종교소설 <장미의 이름>에서 찾아낸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노라. 마침내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더 나은 곳은 없더라' 한 줄의 표현을 내 삶이 가야 할 궁극적 이정표로 삼고 싶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참고로, 저의 MBTI유형은 천상 INTJ '인티제'랍니다)


하숙집 주인 아주머님은 서울의 시장바닥에서 평생 야채 가게를 꾸려 애써 마련한 금쪽같은 집을 대신 지켜줄 나를 위해 송편에 두툼한 고깃국까지 끓여 두시며, 저에게 집 잘 보고 굶지 말라는 신신당부를 하고 고향의 부모님이 계신 남해로  떠나셨지요.


집 잘 보고, 굶지 않는 그러나 고독한 명절.. 거기에 가장 중요한 하나 더 보태었지요. 밤낮으로 승진의  경쟁에 치열한 직장 생활에 치여 이 깨물어도 읽지 못해 벼르고 벼르던 책 한 권을 기어코 완독 할 준비가 되었으니, 내 생애 최고 책 읽는 명절이 되었으니까요.


수십 년의 시간의 흐름을 뛰어넘어, 아무도 없는 빈 집의 정원 한쪽 의자에 앉아 우주의 기운이 보내준 세로토닌을 듬뿍 담은 따사한 햇빛을 쬐며, 마치 우주를 유영하듯 책장을 넘기며 며칠 동안 읽어 내려간 추억의 그 책을 다시 꺼내 읽기로 합니다.


앙코르로 다시 읽는 칼 에드워드 세이건 (Carl Edward Sagan)의 <코스모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한 - 제9부, [별들의 삶과 죽음] 챕터의 문장들을 읽고 또 읽고.. 연휴의 뻥 뚫린 서울의 도로와 신촌의 깊어가는 밤하늘을 올려 보며 이런저런 설렘과 생각에 책장을 덮지 못하고, 하숙집의 정원을 시인 윤동주 흉내 내며 서성였던 삼십여 년 전의 기억이 놀랍게도 다시 찾아온 오늘의 하늘을 바라봅니다.


지금의 나는 초로의 신사가 되었지만, 수십억 년의 하늘은 그대로 남아 젊기만 합니다  '코스모스'가 있는 추억'을 서사로 만들어 준 그때 그 시절 독서의 밤을 수놓은 배경음악도 불러 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에겐 칼 세이건과 하숙집 주인아주머니가 나에게 선물한 특별한 추석이었습니다.   

 

초가을 초저녁에 황혼의 하늘이 서서히 어둠에게 주인공의 자리를 내어주고 무대에서 사라져 갑니다. 지난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누구나 아는 사실에  본능적 아픔을 진하게 느낍니다.

[별들의 삶과 죽음] - 제9장 이 제목 한 줄을 읽는 순간 내 가슴의 별에게 전율의 기운이 감도는 까닭은 작가 칼 세이건이 별과 비유한 인간의 생애와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빅 뱅 (Big Bang)으로 태어난 아기별들이 희로애락의 생애를 거쳐 늙어 사멸해 가는 궤도와 인간들의 운명과 다르지 않음을 시적으로 시사해 주기 때문입니다.


4000억 년의 시간을 지나온 코스모스 별들의 생애는 수명이 다하면 각자의 질량에 따라 신성 (Nova), 초신성 (Ultra-Nova), 블랙홀 (Black hole)로 명망이 되어 멀리 사라져 가는군요. 별과 대비한 생애적 맥락에서 보면 100년 생애의 인간은 유소년, 청년, 중장년, 노년의 주기를 거치며 하나의 생명이 우주에서 사라지지요. 상상해 보건대 4000억 년 우주의 생애를 장수하는 인간 수명 100년으로 나누어 보자면 인간에게 1년의 시간은 별의 40억 년과 같으며, 인간의 하루 24시간은 별의 1,100만 시간에 버금가며, 인간의 한 시간은 별의 45만 시간에 비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코스모스 제9장 - 별들의 삶과 죽음을 읽으며)


나에게 주어진 생애의 한 시간을 우주의 4,000억 년 시간처럼 살아갈 수 있다면 노자의 깊고 넓은 도량 차럼 평정심의 힘으로 차근차근 추구하는 무엇인가를 각자 이룰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아무리 바쁘게 살아간다 해도 주말의 한 시간만큼은, 저녁과 밤의 한 시간만큼은, 영겁 속에서 꿀맛 같은 내 시간을 가질만하지 않을까요? 인간에게 시간은 상대적인 것이니.. 일주일에 두세 시간만큼은 약속의 시계를 풀어 버리고 100만 년처럼 누려 봄이 어떨까요?  당장 두세 시간 갈 곳이 생각나지 않으세요?


그럼 소소하게 뒷짐 지며.. 유튜브의 좋아하는 음악 골라 들으며 동네 한 바퀴 슬슬 걸으며 4000억 년의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 있음의 위대한 경외심을 느껴 봄이 어떨까요? 이 소중한 우주와 하늘을 보며 걷기 위하여 한 푼의 입장료도 필요하지 않으니까요.



무한하다고 믿었던 은하계의 아주 작고 창백하지만, 아름답게 푸른 별 지구도 시간이 지나면 태양의 초신성 죽음에 따라 이승의 생애를 마감할 것이고 인간의 운명도 종착역을 향해 가고 있음이라는 칼 세이건의 추론을 읽으며 마치 저의 운명을 알아낸 것처럼 "와~" 하고 탄성을 지르며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물론 내가 사라진 미래의 시대엔 나라는 사람이 아득히 잊힌 산소와 탄소로 얽힌 원소가 되어, 더 이상 생명으로 존재하지 않겠지요.


불멸의 삶이란 영원한 청춘이란 없음이 증명된 만큼, 역설적으로 저 황홀한 초신성 별무리처럼 검은 우주 속에서 빨주노초파남보 태울 수 있는 열정을 기쁘게 태우고 가야지 생각합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손을 뻗어 내가 가진 빛을 조금이라도 나누어야 하겠습니다.



우주의 본질은 정신도 영혼도 아닌 물질이며 그 물질의 기원을 쪼개고 또 쪼개고 수천번 쪼개 나가면 수소로 시작하여 우리늄까지 92가지 원자로 구성되었고, 인간의 몸도 실상은 똑같은 원자와 분자들의 물리 화학적 조합일 뿐이라는 팩트를 읽어 내렸습니다. 원자와 분자의 조성물로 이루어진, 하나의 생물에 불과한 인간에게 왜 신앙심과 철학적 삶이 필요한가? 질문을 가져 봅니다.


인간을 별에 비유해 보면.. 75억 개 별들이 밀고 당기는 수억 년의 시간 동안 가끔 엄청난 충돌과 폭발의 사건이  일어난다 하여도 은하계의 생명과 신비는 유지되어 온 것처럼.. 인류의 삶을 흔드는 고통과 역경에 우리 생을 맡기고 포기할 수 없다는 비유를 제공하지 않을까요?

[별들의 삶과 죽음]에 [인간의 삶과 죽음]을 대입해 보니.. 미국의 작가 Mark Twain의 글이 불쑥 생각납니다~ “짧은 생애가 지나 후회 없기 위하여.. 안전한 항구를 떠나 무역풍을 타고 탐험하고 꿈꾸며 발견하라..”   아무리 생각해도 젊은이든 시니어든 살아 있는 우리에게 이만한 답은 없지 않을까요?  


추석의 깊고 푸른 하늘에 걸린 달은 나에게 “단순하지만 누를 수 없는 강렬한 세 가지 열정이 내 인생을 지배해 왔으니,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 바로 그것이다.”라고 한 러셀이 말과 함께 떠 오릅니다.


보름달을 바라보며, 믹스 커피의 감칠맛과 베토벤 월광곡에 담긴 평안함의 고독을 당신에게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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