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갈 필요가 없어 딱 10km만 걸어가 보자 (*사진=픽사베이)
장마가 물러가도 습한 더위의 불쾌지수가 높은 여름날의 새벽에 깨어 납니다. 늘상 잠에서 깨면 움직이는 습관대로 커피포트의 스위치를 켭니다. 짝짓기 전에는 이 여름을 절대 떠나 보낼 수 없다며 애절한 떼창을 울리는 매미소리에 새벽의 선잠에서 몽롱하게 깨어납니다. 뜨거운 드립 커피 (Dripped Coffee) 한 모금으로 현실의 하루를 다시 시작해야 하기 때문 입니다.
창 밖 산봉우리를 타고 오른 8월의 태양이 세상을 삼킬듯 불타는 혓바닥으로 솟아 오르고, 밤사이 세상을 포위한 안개가 햇살에 정체를 서서히 드러 냅니다. 안개를 타고 흐른 태양은 온통 '빨주노초파남보' 총천연색 내 젊은 날의 기억들을 비추며 서서히 세상을 불태우기 시작 합니다.
아열대의 하늘 캔버스엔 먹구름이 흑기사들처럼 순식간에 몰려와 무채색의 물감을 잔뜩 뿌리며 천둥소리에 다시 소나기를 몰고 올 기세입니다. 새벽 하늘엔 햇빛과 안개와 먹구름이 대치하며 선전포고를 한 듯 빳빳한 기운으로 노려 보고 있는데, 세상 모르는 매미들의 떼창 소리가 긴장감을 깨트리며 현실의 아침으로 되돌려 놓습니다.
진한 먹구름이 낮게 깔린 아침에 구스타프 말러 (Gustave Mahler)의 교향곡 5번 4악장을 다시 들으며 책장을 넘깁니다. 느리게 흘러가는 아다지에토 (Adagietto)를 흐린 날의 배경 음악으로 깔아 놓고 심호홉을 합니다. 사랑하는 여전히 울어대는 매미들의 합창 소리와 하늘의 구름 한조각을 베어서 드립커피에 섞어 마십니다. 책장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음악을 들으며 한 여름날 무진행 10km길 이정표를 따라 읽어 갑니다.
스무살에 무진을 찾아 가던 의식의 길을 따라 갑니다.
김승옥 작가의 스무살 젊은 시절 그 절정에 달한 언어의 촉수로 유리조각처럼 서슬 퍼렇게 써 내려간 소설의 문장들은 더위에 지친 여름을 잊게 합니다. 가상의 도시 무진으로 가는 이정표를 따라 10km 만 걸어 가면 가을이 배웅 나올듯 합니다.
소설의 첫 문장은 늘상 여러 번을 읽어도 새롭게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버스가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 나는 '무진 10km' 라는 이정표를 보았다."
그리고 제가 가장 좋아하는 몇 개의 문장들을 소개 합니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한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뺑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들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먼 곳으로 유배당해버리고.. 안개, 무진의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프랑스의 작가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 (Marcel Proust, 1871~1922)의 번역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언어적 감수성에 불을 붙여 글쓰기에 눈을 뜨게 해 주었다면, 이 소설의 문장은 작가의 길을 가고 싶던 스무살적 나의 부족한 재능을 확실히 각인시켜 주었지요. 언감생심 저 깊고 높은 문학의 세계에 대충 기웃 거리지 않도록, 글쓰기에 대한 짝사랑을 깨끗하게 단념하고 검투사같은 기업가의 길로 들어서도록 말입니다.
지난주 여름휴가를 떠나는 날 읽을 거리가 마땅하지 않을 때는 습관처럼 책장에서 이 소설을 다시 꺼내들고 여행지로 떠났지요. 사방에 안개 가득한 스무살의 무진으로 가는 10km 여정의 버스에 탑승합니다. 마법처럼 당신과 저를 무진으로 데려다 주는 진한 커피를 다시 내려 마십니다. 안개는 하늘과 땅 사이 공중에 부양한 신비로운 물방울이 되어, 구만리길 먼 미래로 갈 바쁜 길에 다시 찾아와 내 의식의 방 하나를 차지하고 있지요.
9월의 햇빛과 탁트인 공기에 소금기가 맛갈나게 섞인 바닷길 10km를 추억처럼 걷는 꿈을 꿉니다.
그곳이 소설의 무대인 무진이 아니어도 상관없습니다. 무진으로 들어간 주인공이 잠 못 이루는 밤에 '햇빛의 신선한 밝음과 살갗에 탄력을 주는 정도의 공기의 저온.. 해풍에 섞여 있는 정도의 소금기, 이 세 가지를 합성하여 수면제를 만들 수 있다면..' 표현대로, 곧 가을이 오면 쌉쌀한 햇빛과 시원한 공기 그리고 소금기가 섞인 바닷가 10km를 꿈꾸듯 걸어갈 겁니다.
햇빛의 밝음과 살갗의 탄력을 줄 만큼의 해풍이 불어오는 가을의 바다로 걸어 들어갈 생각을 하니 마음은 이미 초가을의 해풍과 파도를 만나는 곳으로 쑤욱 들어가 있습니다.
무진은 나에게 일상을 벗어난 비현실적 가상의 장소 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사는 곳으로부터 10km 떨어진 곳으로 각인 되어 있습니다. 고군분투하며 무덥지근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너무 멀리 갈 수 없을 때, 여기서 멀지도 않은 10km만 가면 여행이 되는 곳이니까요.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나는 심각한 부끄러움을 느꼈다.'로 마무리 됩니다.
햇빛 따스한 가을이 오면 이 문장을 나는 이렇게 마무리 하고 싶습니다..
"내 마음의 무진으로 가는 길 10km를 걸었다. 나는 살아 있음의 기쁨을 느꼈다. 비행기 타고 배 타고 너무 멀리 가지 않아도 된다. 내가 있는 곳에서 딱 10km만 걸어나가 보자. 그 곳이야 말로 따스한 햇볕과 시원한 공기와 해풍이 있는 당신의 무진기행이 될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