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베리 스무디. 의식해서 발음하지 않으면 ‘성조’를 띄게 된다. 1성 1성 2성 4성 1성 2성 4성. 중국어를 배울 때는 어렵게만 느껴지던 성조가 나의 일상이었다니. ‘표준어’ 까짓것 뭐가 어렵다고. ‘사투리’를 놀려대는 친구들 앞에서는 더 천천히 쉬어가며 발음한다. 블루베리. 스무디. 음료 한 잔 마시기가 이렇게까지 까다로워서야. 답답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즐거웠다. 7개의 음절과 그 사이를 연결하는 6개의 음정이 직선이 아닌 ‘곡선’으로 목구멍을 타고 나오는 방법은 나만 아는 것이었으니까. 아무리 아르켜줘도(오타 아닙니다) 당신들의 초행길은 역시 험난하더라고. 사투리는 뭐, 아무나 씁니까.
사실 ‘사투리’를 부끄러워하던 시절도 있었다. 영화산업이 충무로에 묶여있는 한 반드시 서울로 상경하고야 말겠다는 꿈을 가지고 살아가던 시절이었다. 아마 학생부종합전형 따위에 얽매여 있던 시절이었겠지. 그러니 생기부에 더해질 대외활동을 위해 서울을 종종 방문할 수밖에 없었다. 첫 방문은 역시 어색하고 낯설었다. 그러나 엔프제의 타고난 ‘E’ 기질은 당시에도 두각을 보였다. 초면에도 ‘십년지기’ 같다는 말은 그때부터 줄곧 들어오던 말이었거든. 게다가 당시에만 해도 ‘사투리’는 블루오션 중에서도 가장 청정한 1급수에서만 산다는 물고기였다. 한 번 꼬리를 흔들면 모두가 달려와 그 재롱에 기꺼이 박수를 치던 때였던 것이다. 그러니 친구, 선배, 선생님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쉴 틈 없이 나를 감쌀 수밖에. 가수 비가 정신없이 화려한 조명에 늘 감싸이듯.
사투리 좀 써 봐. 그러니 지긋지긋하게 듣던 말이었다. 그리고 되려 묻고 싶은 말이었다. 사투리는 어떻게 쓰는 건데요? ‘사투리’를 ‘사투리’라고 생각해본 적 없었기 때문이다. 비수도권에 살고 있는 모든 당신들은 이미 고개를 끄덕이고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대에는 ‘필살기’가 있었다. 오빠야. 이건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어린 여성들에게 투영된 일종의 페티쉬였다. 이 한마디에 자지러지는 ‘오빠야들’이 수두룩벅적했거든. 아, 이건 전라도 사투리였던가. 어쨌거나 거기에 덧붙이는 한마디가 더 있었다. 까리하네. 쌈디가 방송에서 흔하게 사용하기 전까지는 적어도 나만의 ‘비장의 무기’였던 셈이다. 이 두 마디면 ‘촌스러운’ 서울 오빠야들 입가에 함박웃음이 가득 피더라고.
하지만 나는 동물원 우리에 갇힌 원숭이가 아니었다. 게다가 키가 10cm쯤 훌쩍 자라고 보니 “오빠야, 까리하네” 한 문장을 발기(發起)하던 서울 오빠야들은 모두 내 눈높이 아래에 있었다. 이미 타고난 큰 키에도 불구하고 굽이 있는 신발을 선호하는 나의 걸음은 177cm의 보폭을 유지했거든. 그러니 감히 사투리 좀 써 보라는 문장이 어색한 사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터져 나왔다. 생활 전선에서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던 나에게 어느 날 점장님이 이런 말을 하더라고. 말투가 너무 공격적이야. 아, 깜빡할 뻔했는데, 대장부가 체질이었던 나로서는 최전방을 지원할 수밖에 없어 인천의 어느 한 카페에서 일을 하는 중이었다. 아니, 최전방에서의 전투 중에 방어적일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그래도 어쩔 수가 있나. 까라면 까야지. 한 걸음 물러서 나의 살기를 감추기로 했다. 물론 갑옷 사이로 삐져나오는 것까지 감출 수 있을 만큼 노련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만 이제 와서 조금 억울한 것은 결국 인천도 ‘사투리’를 쓴다는 사실을 얼마 전에서야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이라는 류시화의 시집 제목처럼, 그랬더라면 눈 딱 감고 시시하지만 결정적인 반항 한 방쯤은 제대로 남기고 떠나는 건데. 아쉽지만 이미 지난 일이었다. 그래도 종종 사투리를 흉내 내는 유머러스한 손님들도 있었다. 아메리카노 ‘따신 걸’로 주세요. 음료의 온도를 묻는 나의 질문이 제법 인상적이었던 모양이었다. 따신 거요? 매번 다음 손님 앞에서 서로의 얼굴을 붉히면서 부끄러워했지만, 돌아서면 키득거렸던 추억이 되었다. 그러니 이 글을 읽고 있는 수도권의 어느 당신님, 찔린다면 앞으로는 묻지 마세요. 그냥 피부에 양보하세요. ;)
어떤 사람의 '사투리'는 전염성이 높은 '오미크론급' 변이 바이러스다. 여기서 사투리를 '바이러스'로 표현하는 것은 그만큼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사투리는 이름조차 부여받지 못할 시시한 것이었다. 아무래도 나의 사투리 세포 표면에는 있어야 마땅한 '스파이크 단백질'이 알 수 없는 외부의 힘에 의해 다 뜯겨나간 모양이었다. 결국 아무도 전염시킬 수 없는 '무용한' 바이러스였다. 그래서 세력 범위를 벗어나는 순간, 나의 사투리는 쉽게 힘을 잃었다. 말투가 공격적이라는 점장님의 주의에 쉽게 꼬리를 내릴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생존을 위해서라도 금방 '서울말'에 적응하게 되더라고.
사투리뿐만이 아니었다. 사람들 특유의 '말투'에도 금방 적응하는 편이었다. 아니, '물들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손톱을 모두 잘라내기 전까지는 굳건하게 자리를 지켜내는 봉숭아물 같았으니까. 아주 좋아. 무심결에 뱉어낸 그 한 마디에 잊혀진 줄로만 알았던 너의 체취가 순식간에 힘을 얻어 코끝에서 맴돌았다. 씁쓸한 악취였다. 너의 말투에 흠뻑 젖은 채로 살았던 날들이 미처 다 마르지 못한 채로 구겨져 있었던 모양이더라고. 차마 볕 좋은 날에도 네가 남긴 빨랫감을 털어 말릴 자신이 없었던 거지. 그러려면 네가 남긴 말투 하나까지 곱게 피기 위한 다림질도 마다하지 않았어야 하니까. 지나간 사람 하나를 지우는 일조차 이렇게 어려워서야. 이것 참 속상한 게으름이었다.
그러니 백신에도 끄떡없는 '파급력'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너를 지울 것이 아니라 네가 나를 지울 수밖에 없도록. 그렇게 사시사철 어떤 바람에도 물들지 않는 날카로운 '침엽수'가 되고 싶다. 지금 나의 계절은 여전히 '가을'이고, 나의 반려목은 지나가는 바람마다 휘두르는 성의 없는 붓질에 빨갛게, 또 노랗게 물드느라 피로함이 계엄령 직전까지 쌓인 비상사태의 '활엽수'거든. 다행히 무성한 나의 잎들은 고개를 떨구며 '탈리'를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 출생을 위한 노화 과정인 '낙엽'이 되기 직전에 가장 아름다운 빛깔을 뽐내며 하늘을 물들이는 '단풍'을 즐기는 이유였다. 그러니 나를 물들이고 싶다면 '지금'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곧 내가 휘두르는 붓질에 당신의 '이파리'가 물들게 될 테니. 물론 '사투리'도 빠질 수 없겠다. 당신은 곧 '경상도 여자'의 거침없는 매력에 푹 빠지게 될 예정이거든. 거기서 뭐하노. 빨리 일로 온나. ;)
지난 '큼요일'에 발행한 <움큼한 사생활>도 궁금하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