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설익은 계절의 문턱에서
금요일 밤, 이전 스케쥴로 밤 11시가 돼서야 남편과 귀가했다.
무척이나 피곤한 하루였고, 내일 오전 우리는 브롬핑을 떠나는 일정이었지만 아직 가방도 꾸리지 못한 채였다.
날씨예보도 우리의 발목을 자꾸만 붙잡았다.
주말, 전국에 비. 브롬핑에 비 소식은 치명적이다.
심지어 나는 저녁 메뉴 탓인지 배탈이 났다.
모든 것이 우리의 떠남을 방해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떠났다.
많은 떠남과 돌아옴을 거치며 우린, 이제 어떠한
상황 앞에서도 나름대로 대처할만한 여유도 생겼다.
짜증을 내려면 한없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길은 어디라도 있기에.
우리 앞에 놓여 진 여정에 즐거움만 가득하기를,
여기까지 와서 얼굴 찌푸리는 일은 없기를.
그러다보면 아주 작은 행운에도 아이처럼 기뻐하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가령, 떠나기 직전 겨우 시간에 맞춰 배에 선승하는 일이랄지, 우연히 들른 섬마을 식당에서 햇살을 쬐고 있는 고양이의 느긋한 골골거림을 듣는 일 같은 아주 사소할 수 있는 것에도 미소 짓게 되는 그런 기쁨 말이다.
평소엔 올일이 없는 생경한 이름의 역에 내려
익숙한 친구들과 오랜만의 브롬핑에 나섰다.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건만, 주변의 풍경은 마치 멀리 떠나온 기분에 퍽 설레 왔다.
배를 타고, 몇 개의 섬을 지나 당도한 오늘의 여행지
자, 이제부터 달려볼까?
올 시즌 첫 브롬핑, 프론트 백과 리어의 배낭까지
앞뒤로 꽉꽉 채운 짐과 겨우내 무뎌진 움직임 탓에 오르막 앞에서 브롬톤을 끌고 가는 순간도 왕왕 있었지만, 그 덕분에 길가에 무심히 펴있던 봄꽃이나 푸릇푸릇 움트고 있는 새싹의 고갯짓도 둘러보며 갈 수 있었다.
도심 미세먼지 속 잃어버린 줄만 알았던
봄은 이렇게 섬마을 주변에 사뿐히
내려 앉아 있었다.
오르막과 내리막을 번갈아가며 부지런히 달려,
오늘 하루 브롬톤과 우리가 머물 해수욕장에 도착했다. 사락사락, 고운 모래 알갱이와 바닷바람이
반겨주는 이곳.
아직은 바람이 찼지만, 그래도 바닷가는 늘 설레는 장소다.
옹기종기 오늘 머물 집을 짓고, 달리느라 수고한
브롬톤을 곱게 접어 텐트 옆에 세워놓는다.
너도, 나도, 오랜만에 뜨겁게 달렸구나.
아침부터 분주했던 오늘, 누군가는 잠시 눈을 붙이고, 누군가는 주변 산책을 하고, 누군가는 텐트 안 침낭에서 빈둥거리고, 누군가는 바닷가를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 있고, 또 누군가는 작은 화로에 솔방울을 넣고 불을 피우며 온기를 쬐어 본다.
열심히 달려온 스스로에게 선사하는 여유로움,
함께 왔지만 각자의 시간을 즐기는 지금이 좋다.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도 필요하다,
이따금씩.
도란도란 모여 앉아 음식을 나눠먹고 이야기를
나누는 캠핑의 밤. 언젠가부터 술은 줄이고 따뜻한 차나 커피를 나눠 마시기 시작했다.
온몸에 퍼져오는 따스함에 마음까지 노곤해졌고,
우리는 좀 더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조리는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다음날 언제나처럼 아니온 듯 자리를 정리하고
돌아오는 길, 내리막이었던 곳은 오르막이 되어,
오르막이었던 곳은 내리막이 되어 우리 앞에 펼쳐있었다.
자전거 라이더들에게 지형은 이리도 공평하다.
갈 때 고생스러우면 올 때가 편하고, 갈 때가 편하면 올 때가 고생스럽다.
내리막의 통쾌함도, 오르막의 수고로움도, 딱 반대로 선사해주는 공평함이란.
오르막을 낑낑대며 오르던 우리 옆을 자동차 한 대가 무심하게 지나쳐간다.
너무 빠른 그 속도에, 봄은 곁에 머물 새도 없을 것만 같다.
올해 첫 브롬핑, 다행히도 비는 오지 않았고 조금
쌀쌀했지만 그만큼 서로의 작은 온기조차 소중하게 느껴졌던 그날 밤. 걱정했던 모든 것들은 말간 모래알처럼 그저 사르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얄궂었던 날씨 덕에 의외의 것들이 고맙게만 느껴졌던 그 캠핑의 기억은 아마도 이른 봄날이라 이름 짓는 것이 맞겠다.
* 글 : 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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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빅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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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도어 포토그래퍼인 빅초이와 <시작은 브롬톤>을 쓴 작가 블리는 작은 모험을 즐기는 생활 모험가 부부입니다.
백패킹과 하이킹, 미니멀 캠핑, 브롬톤 라이딩 등 아웃도어 활동을 남편 빅초이가 찍고, 부인 블리가 이야기를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