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친구의 피에 찐한 사랑이 전해진다...

단상 (31 ~ 35)

by 글 쓰는 나그네

* 백혈병 진단 후 항암 치료 중입니다. 제 눈으로 바라본 삶에 대한 짧은 이야기를 담아가고 있습니다.



31. 노트북으로 들려오는 노랫소리가 은은하다. 고열로 힘겨워할 때나 이식 부작용으로 사경을 헤맬 때도 있지만, 이럴 때 이외에는 늘 조용하다. 그 조용함이 지겹다. "병실을 카페처럼..." 만들면 어떨까? 같은 병실에 있는 환우가 음악을 듣고 있길래, 볼륨업을 부탁했다. 맑은 새소리의 울림처럼 노랫가락이 정겹다. 장단에 춤추진 못해도 입 속에서는 춘다. 힘들다고 푸념하며 사는 삶이 아니라 이 곳에서도 희망을 노래하는 카페가 되었으면... 삶이 있는 곳에 희망이 있다. 노래가 있는 곳에 춤이 있다. 내가 머무는 곳에 행복이 있다. 늘 언제나 희망과 춤과 그리고 행복이 넘치는 삶이 있음을 기억하자.

병실이 카페처럼 즐거운 공간이면 얼마나 좋을까!


32. 어느 순간부터 등이 구부정해졌다. 몸이 앞으로 쳐져 키는 줄고 늙은 노인의 모습이 되어간다. 허리를 곧추세우는 일이 뭐 그리 어렵다고 계속 구부정해질까? 삶이 힘들어서, 등에 진 짐이 무거워서, 앞 길이 막막해서... 뜩, 예전 아버지의 모습이 그려진다. 매번 일어서실 때마다 '아이고아이고~'를 남발하시던 아버지를 보며 어머니께서 핀잔주시던 모습. 그 모습을 보며 아버지는 왜 그러실까? 뭐가 그리 힘들다고, 매번 그러실까? 그런 내가, 이젠 아버지를 닮아간다. 좁은 병실 생활에 익숙해지려 움츠리고 구부리며 살아온 몇 개월의 생활이 나를 변하게 만들었다. 중년의 삶이 노년의 삶으로 이어져가는 나를 보며 외친다.

안돼!!!


33. 비가 내린다. 묵혔던 체증이 쓸려 내려가듯 시원하게. 땅바닥에 부딪히고 차에 치이면서도 세상에 희망을 뿌린다. 그 희망에 목소리를 담았다. '나처럼 살아봐!' 우울할 때 나처럼 울어보고, 답답할 때 나처럼 쏟아보고, 막막할 때 나처럼 소리 질러봐! 인생 뭐 있어. 느끼는 대로 바라는 대로 살아보는 거지. 메멘토 모리와 카르페디엠의 경계에서 얼쩡거리지 마라. 죽음을 기억하고 현재를 즐기는 것은 서로 상통되는 의미이다. 지금의 때를 놓치지 말고 살라는 삶의 교훈이다. 비가 말한다. '만질 수도 있고 느낄 수도 있잖아. 그러면 뭐가 더 필요해!'

비가 내린다. 마음의 비가 내린다.


34. 교회 친구에게서 선물을 받았다. 말없이 전해 준 부부의 헌혈증서. 이제는 친구를 넘어 피를 나눈 형제가 되었다. 친구를 위해 생애 첫 헌혈을 했다며 전해 준 헌혈증서의 따뜻함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다시 헌혈증서를 받았다. 여전히 마음이 아리고 아픈가 보다. 나보다 더 나를 위하는 마음이 가슴 시리다. 행복이 멀리 있지 않듯, 감동도 멀리 있지 않다. 선물은 예상하지 못할 때 받게 되면 감동은 배가 된다. 작은 선물에 손편지 하나 덧붙여질 때 느끼는 감동은 사뭇 다르다. 정성이 배어 있는 선물, 그게 진실된 선물이고 감동이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랑은 눈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만 하는 것도 아니고 진실된 행동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래야 느낄 수 있다. 그 사람의 마음을, 그 사람의 사랑을...

친구의 피에 찐한 사랑이 전해진다.


35. 매일 깨어나고 일어남에 감사하다. 지극히 사소한 것들이었는데, 아침에 온전히 깨어날 수 있음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작은 것들에 감사하며 살라고 했는데 사람은 닥치지 않으면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고난의 파고에 휩쓸리다 보면 깎이고 꺾이며 모난돌이 반들반들한 자갈이 되어간다. 거친 숨이 부드러운 쉼으로 이어질 때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시선은 어디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하다. 지금의 내 시선은 거실로 향하고 있다. 거실에서 셰이크를 만든다며 왁자지껄하다. 엄마와 딸 그리고 아들이 곁에 붙었다. 자신만의 원하는 스타일이 있듯 목소리를 키운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시끄러움이 이런 것이구나라며 흐뭇한 미소를 머금게 된다. 야식으로 먹을 건강식이지만 벌써 건강해졌다. 마음으로 나누는 건강이 최고의 건강이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게 최고이듯, 함께 먹거리를 만들고 빚으면서 나누는 과정이 최고의 건강식이다. 믹스 기계음의 단순한 부딪힘이 맑다. 그리고 경쾌하다.

사랑은 함께 빚으면서 피어나는 것이다.



keyword
이전 06화자장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