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혈병 진단 후 항암 치료 중입니다. 제 눈으로 바라본 삶에 대한 짧은 이야기를 담아가고 있습니다.
26. <자장가>
누군가 강연을 하면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로 날아오르고
또 누군가 강연을 하면
웃음소리로 도배되는데
내가 강연을 하면
연신 고개만 끄덕인다.
예전에 몇 번 강연을 해 본 적이 있었다. 나름 준비하며 고생했는데, 끝나고 난 이후엔 허기진 공허함이 몰려왔다. 그래도 아쉬움인지 후련함인지는 몰라도 시원하긴 했었다. 열심히 경청하는 사람도 고개 끄덕이며 공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강연은 앞에 서는 게 두려운 게 아니라 반응이 두려움을 깨닫기도 했다. 연신 고개만 끄덕이는 강연이 될지라도 낙심하지 말라. 피곤에 지친 일상에 푹 쉴 수 있는 쉼의 시간을 주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성공했다고 자부하자. 그게 마음 편하다
최고의 강연은 푹 쉬게 해주는 것이리라...^^
27. 이 숫자의 의미는 뭘까? 43, 29, 42, 21...
로또 숫자로는 2개가 부족하다. 그렇다고 유의미한 배열도 없다. 뭘까? 질문은 했지만, 궁금해할 필요가 없는 숫자다. 단지, 내게만 의미가 있다. 아니지, 백혈병 M3 환우에게도 의미가 있겠다. 정답은 항암 치료받으며 입원했던 기간들이다. 4차에 걸친 항암 기간 중 1차, 3차는 43과 42로 기록된 날들이다. 이 날이 무척 힘들었다. 기간이 긴 만큼 회복의 속도도 느렸고 부작용도 심했다. 저 숫자만큼 한 평 남짓한 침대라는공간에 갇혔다. 누가 공간의 미학이라고 했던가? 공간은 구속이고 단절이다. 공간이 공간으로 의미가 있으려면 그 사이에 '여유'가 있어야 하는데, 여유는 없고 조바심만 넘쳤으니...
12, 14를 더해서 진짜 로또를 사봐!... (12, 14는 중간중간 집에서 요양한 기간이다)
28.마지막 항암을 끝마치고 드뎌, 퇴원했다. 이곳도 정들었다고 막상 떠나려니 눈길이 계속 간다. 5개월의 병원생활, 결코 짧지도 쉽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내 이름이(풀네임) 이렇게 많이 불려보긴 처음이다. 수액을 맞고 수혈을 받고 약을 복용할 때, 그리고 침상 정리할 때도 어김없이 이름을 부른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이제는 누군가 내 이름을 이렇게 살갑게 불려줘서 감사하게 된다. 김춘수 시인의 <꽃>에서 처럼 이름을 불러줘 누군가의 꽃으로 거듭난 느낌이다. 꽃이 된 기념으로 아쉬운(?) 마음을 편지로 담았다. 담당 교수님과 간호사분들에게 정성을 담아 썼지만 글씨체는 마음에 안 든다. 그래도 편지라도 전해서 빚진 마음의 짐은 가벼워졌다. 퇴원하며 복도에서 간호사분들과 찍은 사진 한 컷(허락 구하지 않아 사진은 못 올리겠다), 추억과 기억의 언저리를 넘나들며 이식병동 생활도 마무리했다.
[간호사분들께 전한 편지]
29. 베란다 서재가 너무 추워 큰방에 작은 테이블을 갖다 놓았다. '너 있는 곳에 나 있다'는 다소 울렁거리는 멘트가 '테이블 있는 곳이 서재다'와 비슷한 느낌일 거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글을 쓰고 생각할 수 있어 감사하다. 지금은 긴 호흡이 필요한 시기이지만, 반대로 짧은 생각들이 더 요구되는 시간이다. 짧게 생각하고 짧게 실행하며 소소한 것 하나에도 의미를 찾아보자.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집 앞마당 감나무 밑에 있다고 하지 않던가.
더 나은 삶의 이야기는 지금부터다~~~
30. 글이라고 쓴다. 말이라고 한다. 음식이라고 먹는다. 그리고 길이라고 걷는다. 누군가 정해준 테두리에 갇혀 살고 있다. 그 안에서 성공이라는 부러움의 시선을 얻기 위해 살아간다. 지금까지는 그리고 앞으로도... 내 의지는 정해진 가상의 길에 내 발자국을 남기는 일이다. 그것이 내가 태어나 세상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길이였다. 이런 나는 '내가 아니라, 내 발자국을 남기기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