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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맑다

백혈병 단상 (41 ~ 45)

by 글 쓰는 나그네

* 백혈병 진단 후 항암 치료 중입니다. 제 눈으로 바라본 삶에 대한 짧은 이야기를 담아가고 있습니다.



41. 잠에서 깨어난 하늘이 참 맑다. 모처럼만에 만나는 연인처럼 반갑기 그지없다. '왜 이제야 왔니?' 묻고 싶지만 그러지 못했다. 너라고 항상 깨어있어야 할 의무는 없으니. 가끔은 구름이나 미세먼지 뒤에서 쉬고 싶겠지. 매일 자신을 드러내며 사는 삶은 힘겹다. 핑계 댈 무덤이라도 있다면 그것으로도 감사하지. 오늘처럼 맑은 하늘에 점 하나 찍으면 더러워질까? 혼자보단 낫겠지. 가끔 집 나간 구름이라도 보듬어주렴. 유아독존(唯莪獨尊)하며 살 수는 없는 법. 더불어 함께 살아야지. 그게 세상의 이치다.

유난히 친구가 그립다.




42. 모처럼 책을 읽었다. 일본 작가 하야마 아마리의 『스물아홉 생일, 1년 후 죽기로 결심했다』. 실화를 바탕으로 썼다고 강조한다. 내용은 간단하다. 자신의 삶을 비관하며 1년 후 기를 결심한다. 결심 이후 목표를 정했다. 라스베이거스의 카지노 호텔에서 폼나게 죽겠다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파견사원, 호스티스, 누드모델 등 생소한 직업을 통해 여행 경비를 모으기 위해 도전하며 살았다. 읽는 내내 끝이 어떻게 될까 궁금했다. 절벽 아래 끝을 향해 달려갔지만, 그 끝은 새로운 시작이라는 메시지를 던져준다. 결론은 의외로 싱겁다. 죽지 않아서가 아니라 삶과 죽음의 어떤 특별한 지대를 찾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흘려가는 대로 사는 인생이 대부분이지만, 죽기 위해 1년간 이렇게 열심히 살아간다면 나를 누르고 있는 속박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기다리고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난다!!!




43. "가진 게 없다고 할 수 있는 것까지 없는 건 아니지." 소유에 국한해서 삶을 꿈꾼다. 가진 것이 삶의 기준이 된다. 없어서 못하고 없어서 못 사고 없어서 못 산다고 아우성치는 세상이다. 맨몸으로 태어나 화려한 옷을 입고 죽음을 맞이하지만, 여전히 손에 쥐어진 무언가가 없다는 것에 아쉬움을 더할 뿐이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가는 게 인생인데, 가진 게 없다고 포기한다면 흐르는 강물에 꿈을 실어 보내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없으면 있게 만드는 삶이 우리가 용기를 내고 열정을 불사르게 만드는 힘이다.

흐르는 강물은 언제든지 다시 만난다.


44. 2주 만에 검진을 받으려 간다. 기대와 두려움은 항상 공존한다. "많이 좋아졌습니다. 3개월 후에 뵙죠" 이 한 문장을 듣고 싶은데, 매번 1~2주 뒤에 뵙자고 하니 미칠 지경이다. 4차원의 미로에 들어가 헤매는 것처럼 검사 결과 쪽지를 받기 전까진 두렵다. 그 안에 적힌 숫자는 삶의 기록이기 이전에 설렘과 두려움의 존재이다. 단순하게 배열된 숫자가 뭐라고. 거기에 얽매이며 사는 모습이 애처롭다. 삶의 근본 질문인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해답도 "일단, 수치를 보고..."

그래도 몸이 말한다. 더 좋아졌다고!


45. 교회 집사님으로부터 정성이 담긴 반찬을 받았다. 담긴 그릇만 봐도 사랑이 느껴진다. 시간과 노동이라는 노력에 사랑의 양념이 한껏 뿌려졌다. 침샘을 자극하는 '오이소박이', 잃어버린 식욕을 되찾게 만드는 '묵은지 등갈비찜', 텁텁한 입맛을 돋우는 '물김치', 아삭한 '무김치' 그리고 입맛을 돋우는 음식들... 특히 오이소박이의 시원함과 묵은지 등갈비찜의 달콤한 매력에 푹 빠져 입안과 뱃속이 호강에 겨워 눈물짓는다. 먹고 또 먹어도 배부르지 않다. 사랑에는 언제나 배고픔을 느끼기에 한껏 배부른 사랑을 느껴보고 싶었나 보다.


누군가에게 베푼다는 것. 아프면서 알게 된 소중한 단어이다. 움켜쥐려는 소유욕보다 내게 주어진 재능을 누군가에게 찐한 마음을 담아 전해줄 수 있다면 인생 멋지게 살았노라고 자부할 수 있으리라... 배워서 남주는 삶에 따뜻한 온기를 함께 담는다면 어떨까?

사람은 먹는 거에 쉽게 감동받는다.
먹는 데 눈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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