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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난데 뭘 인증하라는 거냐?

백혈병 단상 (46 - 50)

by 글 쓰는 나그네

* 백혈병 진단 후 항암 치료 중입니다. 제 눈으로 바라본 삶에 대한 짧은 이야기를 담아가고 있습니다.



45. 아내가 핸드폰을 바꿨다. 새 핸드폰을 들고 좋아하던 시간도 잠시 뿐. 은행 계좌 인증을 위해 인증서 설치를 하다 짜증만 대폭 늘었다. 도대체 이게 뭐냐며, 예전 공인인증서 연장하는 것보다 더 어렵단다. 선택 항목이 많은 것도 그렇지만 공동인증서라는 타이틀 속으로 들어가면 헤매다 다시 튀어나온다. 짜증 한껏 받은 후, 분풀이 대상이 필요했다. 아내는 보고만 있는 내게 화살을 돌렸다.


"다른 부부는 남편이 해 준다는 데 자기는 남이야!"


도대체 어느 남편이 해 주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있기엔 불안했다. 핸드폰을 들고, 한 시간여를 헤매다 드디어 공동인증서 설치를 완료했다. 몇 번을 재설정 시도를 했는지 모르겠다. 왜 이렇게 어려운 건지? 나이 들어가는 반증인지? 새로운 기기에 대한 두려움인지?


어느 유튜브의 말이 기억난다. "내가 난 데 뭘 인증하라는 거냐!" 그래 맞다. 내가 난데 남이 나를 인증하게 만드는 게 말이 되냐고! 나를 내가 설명해야 하는 현실이 버겁다. 그냥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 될 것을. 모든 것이 디지털화 되어 가는 세상에서 아날로그적 감성이 아날로그적 삶이 그립다.

디지털이나 돼지털이나 그게 그거다.




46. 다시 필사를 시작했다. 1일 1필사. 책 읽고 밑줄 긋는 횟수는 줄었지만 남기고 옮기고 싶은 문장은 넘친다. 마음이 심란해서 그런가. 책이 눈에서 멀어진다. 머리는 흐릿하고, 눈은 담지 못한 글로 초점을 잃었다. 그래도 인내를 가지고 흘겨보면 눈이 멈추는 곳이 생긴다. 휘휘 휘젓다 걸린 대어처럼 묵직하게 잡히는 문장이 있다. 이런 문장은 기억 속에 남겨야 한다. 기억하기 가장 좋은 방법은 기록하는 것이다. 기록의 가장 좋은 수단은 필사이다. 짧은 문장을 손으로 꾹꾹 눌러 담으면 참을 인자 세 번 쓰는 효과가 있다. 잡념이 정화되고 마음이 안정된다. 되짚어 보고 뒤돌아 보고 다시 깊이 생각하며 사유와 여유의 삶을 만끽하는 소소한 기쁨. 그 기쁨이 짧은 문장을 담는 필사 노트에 온전히 담길 때, 마음까지 훈훈해진다. 삶에서 남길 수 있다는 것. 남길 수 있는 문장이 있다는 것. 누군가의 심장을 두드리게 할 수 있다는 것. 그것 하나면 족하다.

내가 남길 문장은 뭘까?




47. 오늘도 걸었다. 삶의 의미도 건강도 걸으면서 찾는다. 걷는 장점은 생각을 지운다는 데 있다. 다양한 잡스러운 생각도 계속 걷다 보면 스쳐 지나가는 것임을. 땀으로 지우고 바람으로 흘려보낸다. 그러고 나면 머리가 맑아진다. 또한 걷다 보면 목표 지점도 생긴다. 그 지점까지 가야 한다는 소명의식. 목표가 생긴 것이다. 내가 가야 할 길, 행동의 이유가 만들어졌다.


'저기 까지는 걸어야 돼! 너에게 주어진 숙명 같은 과정이야. 이것도 못하면 기도하고 응원해주신 분들께 미안하지 않니. 그리고 너 가장이잖아. 너를 믿고 있는 네 가족은 어떻게 할 거야!'


이렇게 내 안에서 울부짖듯 메아리가 울려 돌고 돈다. 일견 부담스럽다. 하지만, 한 걸음 더 걷게 만드는 힘이 된다. 그 힘이 심장을 뛰게 하고 다리에 힘을 실어준다. 그래 이제 다시 시작이다. 거듭나는 삶. 내 온기를 누군가에게 전해주는 삶. 그러기 위해서는 심장을 뛰게 만들어야 한다. 살아야 한다. 살아서 응원하고 기도해 주신 분들께 이 마음을 전하자.

이 하루도 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48. 생명은 이어달리기와 같다. 누군가의 죽음과 희생이 새로운 생명의 연결고리가 된다. 생명은 그저 주고받는 단순한 과정이 아니다.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그 남은 재에서 새 숨결을 잉태하게 된다. 내가 알던 내가 죽고 또 다른 오늘을 얻었을 때, 다시 주어지는 선물이 생명이다.


나는 죽고 다시 생명을 얻었다. 백혈병 진단 이후 항암이라는 힘겨운 불꽃을 태운 후, 그 남은 재로 새 선물을 받았다. '생명'이다. 내 죽음을 대신해 누군가가 나에게 준 선물이다. 그러니 어찌 허무하게 허비하며 살아갈 수 있겠는가? 이제 오십 하나. 새로운 삶의 길이 열렸다. 어제의 내가 아니듯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내가 아니다. 악성 골수가 모두 죽고 새로운 골수로 다시 태어났다. 그러니 새 사람이 된 것이다. 과거의 묵은 때를 벗고 새로운 길에 도전하자. 새 길에는 새 희망이 주어진다.

나도 누군가에서 생명의 바통을 넘길 때까지...




49. 병원 생활하며 알게 된 환우와 모처럼 통화했다. 백혈병도 종류가 다양한데 유일하게 같은 병이라 서로 친해졌다. 서로의 안부를 묻기도 하지만, 서로의 상태가 어떠한 지 묻고 비교하기 위함도 있다. 한쪽이 약한 고리가 되면 붙잡아 주고 힘이 되어 주기도 한다. 그분의 삶이 나의 삶과 이어져 있다. 어깨를 빌릴 수 있는 동지애 같은 느낌이랄까.


그분을 통해 입원했던 환우들의 상태를 듣게 되었다. 막 퇴원할 때 이식하려고 가시던 두 명 중, 한 분은 하늘나라로 가셨다는 소식과 또 다른 두 명은 1,2차 관해에 실패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관해에 실패하면 조혈모세포 이식도 어렵다. 마지막 희망의 끈을 붙들기 위해 더 큰 대학병원으로 가던지 아니면 마지막을 준비해야 할 수도 있다. 이런 소식은 내 불평을 잠재우게 한다. 이전까지 왜 이렇게 나만 수치 회복이 안되냐며 근심 걱정에 사로잡혀 살았는데, 오히려 이런 내게 감사해야 할 이유를 깨닫게 해 준다.

감사는 감사를 잉태한다.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라!




50. 회사에서 문자가 왔다. 휴직을 연장하려면 휴직원을 다시 제출하라고. 아직 몸은 정상이 아니다. 점점 나아지고 있음을 알지만, 조심해야 될 때임도 안다. 휴직 이후 별다른 수입이 없어 걱정이다. 가장의 책무는 주어졌는데 그 역할을 못하고 있어 마음이 아프다. 가족의 생계가 여전히 내 어깨에 달려 있으니. 이후 6개월을 더 버틸 수 있을까? 현실적인 고민이 깊어진다. 어떻게 살 것인가? 백지를 놓고 그려보지만, 백지상태 그대로다. 별다른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 나무도, 한 포기 풀도, 오두막도 아직 세우지 못하겠다. 재택근무할 수 있는 것은 없을까? 회사 경영여건이 어려워, 휴직 연장하면 복직이 가능할지도 모르겠고 언제 해고될지도 모를 일이다. 정리해고, 구조조정이 이전까진 남의 일이었지만 이제는 피부로 거칠게 다가온다. 태풍의 눈처럼 지금 이 순간은 고요하지만...

다시 살아도,
여전히 먹고사는 게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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