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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상희 Jun 11. 2024

나는 나를 모른다

무슨 음식 좋아하세요?

내가 학교 다닐 때 유행하던 것이 있었는데 다이어리에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빼곡히 써넣는 일이었다.

좋아하는 계절은? 좋아하는 음식은? 좋아하는 색깔은? 좋아하는...... 등등이다.

기억나는 건 좋아하는 계절은 늦은 가을이었고, 좋아하는 음식은 물이었다. 좋아하는 색깔은 초록이라고 했던 것 같다.


늦가을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었고, 물을 좋아한다는 건 딱히 생각나는 음식도 없거니와 물을 원래 많이 마셔서 그냥 그렇게 쓴 것이었다. 좋아하는 색깔은.. 한참을 고민했었다. 사실은 연두나 핑크 노랑을 좋아했었다. 그런데 어쩌다 초등 1학년때 전국 그림 그리기 대회에서 큰 상을 받게 되고 그 후로 계속 학교 대표로 그림 그리기 대회에 나갔는데 성적이 썩 좋지 않았다. 어느 날 그림 그리는 나를 가만히 보시던 선생님께서-네가 칠하고 싶은 색깔을 약간 진한 색으로 바꿔만 보자-하셨다. 그리고 다시 상을 받게 되었다.


연약해 보이는 색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내가 연약해 보이니까 패쓰~. 그럼 보라? 악! 보라색은 예술적인 기질이 있거나 미치광이가 좋아하는 색이라고-수첩 맨 마지막 장에 쓰여 있는 것을 고 말았다. 그래서 오랫동안 내가 좋아하는 색은 가장 무난한 색인 초록이 되었다. 초록을 좋아한단말이 거짓말은 아니다. 내가 입고 다니는 색이 거의 카키색인 것을 보면-초록은 동색 아니겠는가.


오늘 아침 두부조림을 해서 밥을 먹다가 남편에게 말했다.


자기야, 나 좋아하는 음식이 두부인가 봐.


몰랐냐?


몰랐다. 나는 내가 두부를 좋아하는지 몰랐다. 그냥 영양에 좋다고 하니 먹는 거다라고 생각했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낯선 식당에 가거나 메뉴가 엄청 많은 식당에 가면 고민 않고 순두부찌개를 시킨다. 전 중에서도 두부 전이 좋다! 두부가 듬뿍 들어간 동그랑땡이 좋고, 두부가 적게 들어간 된장찌개에 섭섭하다. 반찬거리가 없으면 두부를 뜨건 물에 데치고 김치를 볶아서 놓으면 오케이다. 그랬구나. 나는 그냥 그런 줄 알았는데 내가 두부를 좋아하는 걸 남편은 알았구나.. 남편이 말했다.


너는 두부 좋아하는 거를 이제 안 것처럼 말한다. 지난번에 니가 "우리 밭에 꽃들이 모두 보라색이야. 나는 그냥 심은 건데 생각지도 못하게 모두 보라색이네"한 것하고 똑같다야. 붓꽃, 매달톱꽃, 라벤더, 수국을 니가 왜 심었겠냐. 다 그냥 자란 게 아니라 니가 심은 거잖어. 아니, 잘 자라라고 튼튼한 거 심었네, 향기가 좋아서 심었네, 이뻐서 심었네 하지만 다 보라색이잖어. 너는 보라색을 좋아하는 것도 이제 알았지? 참 어이가 없네..


한다. 나도 어이가 없다. 나는 아직도 나를 연구해야 하나보다. 그런데 저렇게 파랗게 핀 수국이 왜케 이쁜 것이냐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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