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 환불원정대

바보인가

by 배추흰나비

10Kg에 4만 원이나 하는 호박 고구마를 잘 먹고 있었다. 껍질이 단단하고 당도가 높아서 아침식사 대용으로 좋았다. 일요일 저녁, 월요일 아침에 먹을 고구마를 준비하는데 상자 아래쪽 고구마가 물컹했다. 껍질이 두꺼워서 썩는 것을 본 적 없는 고구마였는데 날씨가 풀리면서 썩었구나 싶어서 하나씩 들어냈다. 기껏해야 두어 개 썩었겠지 싶었는데 줄줄이 썩어 있었다. 그냥 버리려고 했는데 거의 열개 넘게 골라내고 나니 이걸 어떻게 할까 고민이 되었다. 늘 보관한 곳에 늘 보관하던 대로 두었는데 아마도 구입할 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나 의심이 들었다. 그러다가 고구마를 구입 한 마트에 가보기로 했다.

다음날이 되기까지 밤새 머릿속으로 시나리오 수십 개를 쓰며 전의를 다졌다. 싫은 소리를 잘 못하는 성격인 나는 몇 시에 갈 것인지, 어떻게 말할 것인지, 친절하게 혹은 불친절하게 나의 요구를(같은 양의 새 고구마) 들어주지 않았을 경우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사실은 갈지 말지에 대해 더 오랫동안 고민했다. 바꿔주지 않아도 어쩔 수 없지 않나 하고 생각하면서 뭐 하러 가나 싶었다. 그냥 버릴까 하다가 밑져야 본전이지 싶어서 어쨌든 가 보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다른 고구마에 비해 비쌌기 때문이기도 했다.


일주일 전에 구입했기 때문에 영수증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니어서 내가 그곳에서 고구마를 구입했다는 증거가 부족했다. 그래도 문자영수증이 남아 있어서 그것을 들이밀기로 했다.

월요일 아침 일찍부터 상품에 불만을 갖은 사람이 가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아 11시쯤 마트에 갔다. 시뮬레이션을 몇 번이고 머릿속에서 돌리고 갔지만 괜히 쫄렸다. 핸드폰에 저장된 영수증을 미리 열어 놓고 카운터 쪽에 가서 썩은 고구마 봉지를 내밀며 여기서 구입했는데 이렇게나 많이 썩어 있었다고 하니 채소 진열을 하고 있는 직원에게 가보라고 했다. 열심히 상추를 포장하고 있던 담당직원에게 고구마 봉지를 내밀었다.


10킬로에 4만 원이나 주고 샀는데 이렇게나 많이 썩어 있어요.


아 그러세요? 날이 풀리면서 썩었나 보네요. 어떻게 해드릴까요?


같은 무게로 바꿔 주세요.


내가 가져간 고구마를 달아보니 1780g이었다. 직원이 쓱쓱 담아서 저울에 잰 고구마는 1800g이었다. 신의 저울을 가진 손을 보고 무표정하던 우리는 얼굴을 마주 보고 하하하 웃었다. 내가 걱정했던 수많은 염려들은 그냥 아무것도 아니었다.


외국인도 아니면서 말이 안 통할까 뭔 걱정을 그렇게 하는지 한심하다. 이것이 만약 회사 일이었다면 나는 고민도 안 했을 거다. 당당하게 이야기하고 깔끔하고 빠르게 일처리를 했을 것이다. 밖에서는 유능하다는 소리를 듣는 나는 왜 나의 이익 앞에서는 제일 먼저 포기를 떠 올리고 권리를 찾으려 하면 무엇 때문에 한 없이 쪼그라드는 걸까.


완충한 에너지를 다 쓰지도 않았는데 직원과의 담소 몇 마디에 방전이 되어버린 나는 집에 와서 30분을 누워있어야 했다. 바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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