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동 땅콩집
처음으로 온전한 나만의 공간을 갖게 되었다. 스물셋. 나의 첫 자취방. 긴긴 기숙사 생활을 끝으로 얻게 된 나의 공간은 작아도 너무 작고, 좁아도 너무 좁았다. 평수로만 따지면 2.5평쯤 되었으려나.
나는 그 집을 '오정동 땅콩집'이라고 불렀다. 애칭 비슷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비싸고 좋은 차를 뽑으면 그 차에 이름을 지어주고 애지중지 아끼고 보듬는 것과 비슷한 심리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비록 내 집은 전혀 비싸지도 않았고 예쁨은커녕 크게 좋다 할 것도 없었지만 말이다.
땅콩 같았던 내 집에서 정말 신기했던 사실 중 하나는 살짝 길쭉하면서도 뚱뚱하고 작은 그 모양 안에 책상, 장롱, 싱크대, 화장실, 침대 같은 것들이 착착착 배치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방 문을 열자마자 바로 보였던 그것들. 좁은 공간 안에 배치되어 있으면서도, 어쩜 다들 오밀조밀하게 한 자리씩 꽤 차고 들어앉아 있는지. 이런 집의 가구 배치를 맨 처음 생각해낸 사람은 아마도 테트리스의 신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렇다. 이쯤 되면 짐작했을지 모르겠지만, 맞다. 우리 집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고시텔이었다. 이름까지도 선명한 행복 고시텔.
내가 다녔던 대학교 학과 특성상, 우리는 4학년 여름방학 때부터 학점을 대체할 수 있는 현장실습을 나갈 수가 있었다. 동기들 대부분은 현장실습을 나가는 분위기였고, 나도 나 나름대로는 현장 학기를 나갈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것에 있어서 고민을 많이 했다. 캠퍼스 생활을 더 즐기면서 수업으로 학점을 채울 것인가. 아니면 여름방학 때부터 실습을 나가서 학점을 채우고 남들보다 좀 더 빨리 사회생활을 시작할 것인가.
내 선택에 따라서 인생의 방향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 버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후자를 택했다. 빨리 돈을 벌고 싶기도 했고, 대학생 때 자취를 한 번도 못해보면 나중에 후회될 것 같았다. 캠퍼스에서의 추억과 기숙사에서의 경험은 충분했다. 나는 새로운 자극에 놓여있고 싶었다.
하지만, 자취를 하기 위한 준비. 특히, 경제적인 준비가 하나도 되어 있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대학교 1학년 때부터라도 돈 좀 차곡차곡 모아놓을 걸 싶었다. 그땐 세뱃돈도 참 많이 받았었는데. 알바도 좀 하고 그랬어야 했다. 그런데 난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몰랐으니까 수중에 있는 돈으로는 내가 원하는 조건의 집에서 백 프로 아니 천 프로 살 수 없었다. 서울이 아니니까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싶었는데, 나의 우둔함이었다. 백만 원으로 구할 수 있는 집은 서울 밖에서도 어려웠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사실은 내가 물욕이 적은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내가 만약에 물욕이 많다 못해 넘쳐흐르는 사람이었다면 우리 부모님에게 온갖 고집과 떼를 써 가면서 내가 살고 싶은 집의 보증금을 마련해 달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내가 이래 봐도 한 성격 하니까 객기 부리는 건 어렵지도 않다. 그런데 나는 그러지 않았다. 물론, 넓고 쾌적한 집에서 첫 자취를 시작할 수 없다는 냉혹한 현실 때문에 한동안은 괜히 울적하기도 하고 마음이 시리기도 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내 것이 아녔으니 별수 없지 정도로 생각해 버리니 체념도 쉬웠다. 그냥 내 공간. 내 집. 내 첫 자취방으로 불릴 수 있는 공간만 생기면, 작게 시작해서 점점 키워나가는 재미도 있을 것 같았다. 내 크기에 맞게 채워나가지 뭐. 그런데 이 와중에 나는 운이 좋았다. 보증금 100만 원에 월세도 정말 파격적으로 낮았던, 그러면서도 햇빛 잘 들고 안전한. 그야말로 내 상황에 딱 맞는 집을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까닭은 내 친구가 행복 고시텔에서 거의 안방마님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기간을 다 채우지 않고 갑자기 나가버린 학생 때문에 집주인 아저씨가 곤란 해 졌다는 소식은 내 친구에게 가장 먼저 닿았다. 나와는 달리 말빨도 좋고 수완도 좋았던 그 친구는 집주인 아저씨와 어떻게 대화를 나눴는지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아저씨께서 무조건 내 조건에 맞게 그 방에 살 수 있게끔 허락해 주셨다고 했다. 뭐 이런 아저씨가 다 있나 싶었는데, 공실로 인한 손해보다는 낮겠다 싶어서 내게 베푼 친절함 같은 것이라고 나는 받아들였다. 윈윈(win-win) 전략 같은 뭐 그런 것. 어쨌든 나는 아저씨의 친절함 덕분에 오정동 땅콩집에서 첫 자취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언젠가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사람 한 명이 생활하는데 불편함을 느끼지 않으면서 살기 위해서는 최소한 집 크기가 7~8평 정도는 돼야 한다고. 그래야 인간답게 살 수 있다고. 그런데 인간답게의 기준은 과연 누가 만든 것일까. 그 글을 기준으로 삼으면 나의 땅콩집은 그 최소한에도 한참 못 미칠 정도로 작고 좁은 집이었는데.
그런데 나는 그 땅콩집 속에서 잘 먹고 잘 싸고 잘 잤다. 식물도 키웠고 이불 빨래도 하고, 심지어 어떤 날에는 매운탕이 먹고 싶어서 재료를 사다가 끓여 먹었던 적도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나는 그 땅콩집에서 첫 사회생활의 고단함을 마음 편히 내려놓고 쉴 수 있었다. 현장 실습이긴 했어도 어쨌든 사회생활은 사회생활이었다. 실수 투성이었던 내 하루는 좁은 공간만이 줄 수 있는 특유의 안락함 속에서 위로와 휴식을 선물 받곤 했다. 괜찮아, 다시 힘을 내.
난 오정동 땅콩집이 작아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하루하루의 실수도 감당하기 어려워 바짝 날 서있던 나였는데, 집까지 넓어서 나 혼자 덩그러니 남아있는 기분까지 함께 느껴야 했다면 나는 더 날카롭고 뾰족해졌을 것 같다.
침대에 누우면 발 끝에 벽이 닿고 손만 뻗으면 책상이 닿았던 그 친밀한 거리. 나는 그 친밀함을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