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 기숙사
고등학생이 되자마자 입학식 다음으로 가장 먼저 한 일은 기숙사에 들어간 것이었다. 사실 집에서도 충분히 학교를 다닐 수가 있었는데, 부모님은 여전히 유별난 맞벌이를 하고 계시기도 했고, 수능이라는 큰 산 앞에서 내가 더 많은 시간을 공부에 할애하기 위해서는 기숙사가 답이었다. 성적순으로 기숙사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해서 엄마도 나도 참 많이 조마조마했었는데, 어떻게 운이 좋아 1학년 때 들어간 기숙사를 수능 D-100을 남겨둘 때까지 쭈-욱 살게 되었다.
기숙사는 지어진 지 오래되지 않아서 대부분의 것들이 새 것 같았고, 학생들이 공부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건물은 총 3층이었는데, 1층에는 사감실과 학생들이 공부하는 열람실이 있었고 2층과 3층에는 호실별로 방이 각각 배치되어 있었다. 한 호실에는 1학년 두 명, 2학년 두 명, 3학년 두 명. 이렇게 랜덤으로 정해진 6명이 함께 모여 생활해야 했는데, 개인 침대와 개인 사물함이 모두 정해져 있어서 크게 싸울 일은 없었다. 열람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 사람 앞으로 선반이 달려 있는 똑같은 책상이 한 개씩 동일하게 주어졌다. 여럿이 함께 모여 생활하는 공간인 만큼 나에게 분명하게 정해지는 것들이 많이 있었고, 내가 지켜야 하는 생활 규칙 또한 내게 정해진 것만큼이나 많이 생겨났다.
그 규칙들은 대부분 이런 것들 이였다.
외출과 외박 시에는 사감 선생님께 사전 공지하기.
야간 자율학습 후 열람실에 10시까지 모이면 11시 30분까지는 의무적으로 공부하기.
30분의 휴식 후 12시 점오 이후에는 잠자는 곳은 반드시 소등하기
새벽에는 샤워실 사용과 세탁기 건조기 사용금지.
떠들지 않기 등.
약간 귀찮긴 했어도 지키는 데 크게 어렵지 않은 것들이었고, 처음에만 어려웠을 뿐 익숙 해 지니 집에서의 생활보다 편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집에서 혼자 지냈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 집에서는 빨래도 신경 써야 하고 가끔씩 청소도 해야 하고 화분에 물도 줘야 해서 신경 쓸 일들이 많았었는데, 기숙사에서는 빨래도 각 호실마다 한 명씩 돌아가면서 같이 하면 됐고, 화장실 청소도 따로 해주시는 분이 있어서 나는 내 것들만 깨끗하게 정돈하면 그걸로도 충분했다. 사실 가장 좋았던 건 아침식사부터 저녁식사까지 급식실만 가면 만사 오케이였다는 것이다. 맛뿐만 아니라 영양균형까지 세심하게 고려된 밥을 매일매일 챙겨 먹을 수 있다니! 이전까지만 해도 나는 집에 혼자 있으면 밥은 물론 물 한 모금도 잘 먹지 않았는데,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밥도 물도 혼자 챙겨 먹으려니 맛이 없었을 뿐. 기숙사 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밥도 물도 참 열심히 먹었다.
그래서 였을까.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기숙사생들이 가장 지키기 어려워했었던 두 가지 규칙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야식 시켜먹지 말기'와 '새벽에 무단 외출하지 않기'였다. 한창 자라나는 시기이기도 하고 아침부터 밤늦게 까지 공부를 하다 보면 우리는 늘 출출할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사감 선생님들의 눈을 요리조리 피해 가며 야식을 시켜먹곤 했는데, 그 방법이 참 기이하고 독특했다.
내가 가장 또렷하게 기억하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일명 ‘군중 속의 혼란 법(방금 내가 지은 이름)’ 은 작명 센스에서 유추할 수 있다시피, 혼란스러운 군중을 이용하여 배달음식을 1층에서부터 방까지 몰래 옮기는 방법이다. 여기서 관건은 사감 선생님 눈을 피해 음식 냄새가 복도에 퍼져나가려고 하는 그 찰나에 재빠르게 위층 방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말 신기했던 사실 중 하나는 각 방마다 꼭 대범한 애들이 한 명씩 있었는데, 그런 애들은 이따금씩 정말로, 기숙사 현관문으로 나가서 당당하게 음식을 받아오기도 했다. 물론 사감 선생님의 눈을 피해서.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대다수는 1층 화장실 창문의 좁은 쇠창살 사이를 이용 해 배달음식을 받곤 했다. 나 역시도 그 통로를 선택하는 쪽이 그나마 덜 긴장이 돼서, 당당함에 운을 걸진 못했다.
두 번째 방법은 '우물가에서 물을 퍼올리듯이(이것도 방금 내가 지은 이름)'라는 건데, 주로 2층에 방이 있던 기숙사 생들이 많이 쓰던 방법이었다. 나도 이 방법이 심리적으로는 가장 안정감이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사감 선생님 눈에 걸릴 위험이 다른 방법들보다 적었기 때문이었다. 방법은 간단하다. 기숙사 생들은 처음에 방배정을 받으면 호수와 이름이 적힌 이름표를 받는다. 랜덤 배정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사감 선생님들께서 학생들의 이름을 빨리 외우기 위함도 있었다. 실제로도 우리는 점오 시간에 명찰을 목에 걸고 있기도 했었으니까.
목걸이형 명찰은 야식 배달에 역사에 길이 남을 중요한 도구였다. 왜냐하면, 줄들만 하나로 이으면 밧줄처럼 견고하게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명찰 줄 끝에 쇠 부분으로 고리가 있어서 그 고리를 서로서로 연결하면 됐었다. 한 방의 최종 인원인 여섯 명의 명찰 줄로는 1층까지 내려보내기에 부족함이 있었으므로 그럴 때에는 옆방 친구들에게 명찰을 빌렸다. 나름의 수고로움이 담긴 명찰 줄로 만든 긴 줄이 완성되면, 그다음에 할 일은 세탁 바구니에 돈을 넣어 배달 아저씨와 컨택을 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하도 그 짓거리를 하니, 늦은 시간 여고로 배달 오시는 분들은 나중에는 알아서 척척척 세탁바구니에 배달음식을 전달 해 주시곤 했다. 그러면 우리는 점오 전, 30분을 이용 해 음식을 먹어치우고, 냄새까지 지우고 나면 미션 클리어. 그때 먹었던 야식들은 평범하게 먹었을 때 보다 훨씬 맛이 좋았다. 이 짓을 3년 동안 했다고 상상해 보면, 공부보다도 더 기억에 남는, 내 기숙사 생활의 꽃이었다고 자부할 수 있다.
우리들의 이상한 짓은 새벽에도 멈추지 않았다. 사감 선생님이 잠든 틈을 타서 학교 정문 앞에 있는 편의점에서 사 온 음식들을 몰래 먹는 것 또한 별미 중에 별미였다. 수험생인 우리들은 새벽까지 안 자고 버티는 일이 식은 죽 먹기였으므로, 새벽 탈출은 사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CCTV만 없었다면 말이다. 가끔 정말 어쩌다 가끔 기숙사 내에서 도난 사건이 발생하기라도 하면, 사감 선생님은 CCTV를 꼭 돌려 보시곤 했었는데, 그럴 때 운이 나쁘면 과거의 새벽 탈출이 늘 들통나곤 했다. 그것만 아니면 사실 가장 쉬운 방법 중 하나였다.
이것 말고도 기숙사에서 추억할 수 있는 일들은 정말 많았다. 체육선생님이셨던 사감 선생님을 좋아했던 일, 같은 방 동생이 코를 너무 심하게 골아서 방을 바꿔달라고 울면서 호소했던 일, 친구 책상에 있던 일기장을 몰래 살펴봤다가 크게 다툰 일, 친언니처럼 나에게 잘해줬던 기숙사생 언니를 많이 믿고 따랐던 일, 우리 방 동생들이 깜짝 생일파티를 해줬던 일 등등등. 주마등처럼 흘러가는 기억들 속에서 공부하느라 힘들고 찌들었던 나에 대한 기억보다는 오히려 그때 그 사람들과 즐거웠던 추억들이 더욱더 분명하게 기억난다.
3년이면 서당개도 풍월을 읊는다고 했다. 나는 수능을 망했기 때문에 3년이라는 그 시간 동안 학문이 증진된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제와 생각해 보면 외동딸로서는 내가 경험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경험했다고 생각한다. 항상 언니가 있었으면 좋겠고 동생이 생기면 어떤 기분일지 몰라 궁금했었는데, 막상 언니를 언니라고 불러야 하고 동생들 앞에서 든든한 언니 노릇도 해야 하는 상황이 저절로 생겨나게 되면서, 좁았던 내 세계가 차츰차츰 넓어질 수 있었다. 맨 처음에는 언니를 언니라고 부르는 게 너무 낯 간질스럽고 어려웠었는데. 동생들은 또 어떻고. 언니 언니 거리면서 나한테 다가와서 사근사근하게 구는데. 정말!!! 안 챙겨주고 싶어도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었다. 이건 정말 기숙사가 아니었으면 못했을 경험이었거나, 아니면 나이 먹고서 주책맞게 뒤늦게 마주했을 경험이었겠지.
가족보다도 더 자주 보며 많은 대화와 추억을 쌓았던 그때의 언니, 동생들.
톰과 제리처럼 티격태격했지만, 부모님을 대신해서 우리들을 항상 지켜주셨던 네 분의 사감 선생님.
그때를 함께 했던 사람들과 공간들이 내게는 가족이고 우리 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