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wa솨 Sep 29. 2019

열한살에 마주한 단어

본가 주공 아파트



 '정착'이라는 단어를 인생에서 온전히 마주하기까지 십일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태어난 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 이동하는 삶을 열렬히 바라는 것을 종종 본 적이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마음속으로 불편함을 느꼈다. 잦은 이사 덕분에 한국지리 시험이 껌이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꽤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어두웠다. 부모님께 잦은 이사가 싫고 이제 그만 전학 다니고 싶다고 불평했던 적은 없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나도 이사를 다니는 삶이 힘들게 느껴졌던 것 같다.



 이사는 보통의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 아니다. 공과금 정산부터 시작해서 일정관리, 이삿짐센터 예약, 짐 정리, 집주인. 신경 쓸 일이 정말 한두 가지가 아닌데, 그러한 일들로 지쳐 보이는 부모님 얼굴 앞에서 내 불평을 말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나는 생각보다 일찍 어른 흉내를 내는 아이였고,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던 내 불평들은 그대로 내 안에 쌓여만 같다. 나는 까맣게 짙어졌다. 하지만 손여사가 이런 나의 속사정을 캐치하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결국 엄마는 결단을 내렸고, 그 결단 덕분에 나는 더 이상 전학을 다니지 않게 되었다.




 새로운 집은 우리 세 식구가 살기에 딱 좋은 집이었다. 손여사 역시 그간의 삶에 이골이 날 정도였으므로, 너무 크지도 너무 작지도 않은 임대 아파트 집을 보자마자 덜컥 계약을 해 버렸다. 이번에도 시세 차익 같은 건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이만하면 그냥 들어가 살만 하겠다 싶은 맘 때문이었다. 덕분에 집주인과 세입자가 같아졌고, 그 집주인과 세입자는 우리 가족이 되었다.



 우리집이 유동성을 잃고 한 곳에 고정되었다는 사실은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내가 속한 또래집단과, 학교. 더 나아가서는 지역사회의 일원으로서 드디어 속했다는 안정감. 지친 마음을 언제든지 내려놓고 편히 쉴 수 있다는 안정감. 귀소본능을 알게 되었다는 안정감 외에도 수많은 안정감들을 경험할 수 있게 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안정감은 시간의 흐름 속에 산다는 안정감이었다.



 이 말이 무슨 말인가 하면 이런 거다. 예전에 우리 지역의 기차역은 시내에서도 중심가였던 롯데리아 삼거리에 위치 해 있었다. 그런데 내가 고등학생 때였나. 아예 시내 밖으로 나가버리더니, 그 주변으로 시외버스터미널과 이마트, 맥도널드까지 생겨 버렸다. 우리가 구역전 자리라고 부르던 그곳에는 문화의 전당과 공원이 새롭게 조성됐는데, 아마 예전의 모습을 몰랐던 사람들은 그 자리에 기차역이 있었을 때의 모습을 쉽게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난 변화들을 모두 살펴보며 자랐기 때문에, 그곳에 대한 히스토리를 그 어떤 누군가에게도 자신 있게 설명할 수 있다. 이것뿐일까. 시간의 흐름 속에 스며들어 나도 함께 그 흐름 속에 살다 보면, 몇 년째 같은 간판을 달고 있어도 그 안을 꽤 차고 있는 사장님이 몇 번째 사장님인지 다 알 수 있었고, 어렸을 때는 그렇게 볼품없고 짓궂었던 남자애가 인물도 훤해지고 젠틀 해 졌다며 호들갑을 떨거나, 매일 춤만 추던 그 언니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안무가가 되었다며 대단하다고 말할 수도 있게 된다.    

 


 사람, 사물, 장소. 내 주변 모든 것들의 변화를 바라보며 산다는 것.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 모든 것들의 히스토리를 알아가게 되는 것.

 그리고 그런 것들이 주는 안정감.



 이 모든 것들은 반드시 한 곳에 오랫동안 머물러야지만 느낄 수 있는 것들이었고, 비로소 내가 그러한 것들을 직접 느끼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을 때에는 열한살에 처음으로 마주한 그 단어가 내겐 너무 감사하고 소중했다.

이전 05화 층층이 쌓여있는 것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