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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대머리여도 미녀가 될 수 있다

제법 특이한 이력이 있는, 어느 모습으로도 사랑받을 만한 보통의 인간

by 양별 Mar 23.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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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뻐지고 싶었다. 선생님 몰래 서툰 손으로 고데기를 만지던 어린 시절부터, 어느덧 머리손질과 화장이 익숙해진 지금까지 줄곧 그랬다. 사람은 머리빨이라고 했던가. 내가 하는 화장에는 한계가 있지만, 남이 해주는 머리에는 한계가 없었다. 그래서 앞머리를 내고, 질릴 때쯤 없애고, 염색을 하고, 파마를 하며 머리에 이런저런 변화를 시도했다. 머리 스타일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내 모습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나는 그런 내가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고백하자면 내가 사랑하던 내 얼굴은 머리빨이었다. 그래서 항암치료를 앞두고 -그러니까 머리카락이 전부 빠질 날을 앞두고- 한참을 고민했다. 머리카락을 미리 밀 것인가, 버틸 것인가. 미리 밀면 관리가 편하고, 밀지 않고 버텨도 결국 머리가 거의 다 빠져 골룸처럼 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삭발이냐, 골룸이냐. 고민 끝에 결국 삭발을 결정했다. 긴 머리카락이 몇 가닥 남아있는 것보다, 머리카락이 아예 없는 편이 그나마 나을 것 같았다.


젊은 여자가 삭발하는 사뭇 진귀한 광경을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사람이 없을 법한 평일 낮 시간대에 미용실에 들렀다. 20대 후반의 여성 미용사가 혼자 운영하는 곳이었다.

“군 입대 머리보다 더 짧게 잘라주세요.“

가게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용기 내서 말했다. 군 입대랑 관련도 없어 보이는 사람이 머리를 밀어달라니, 미용사가 깜짝 놀라 이유를 물었다. 나는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았으나 결국 항암치료를 앞뒀다고 대답했다.


“제 친구도 3년 전에 항암치료를 받았는데, 지금 엄청 잘 지내고 있어요. 손님도 분명 치료받고 건강히 잘 지내실 수 있을 거예요. 손님은 두상이 예뻐서 삭발을 해도 예쁘시네요.“

긴 머리카락이 후드득 떨어진 후 곧이어 머리 전체를 미는 이발기계 소리 너머로, 미용사가 구태여 위로를 건넸다. 그때 내 머릿속엔 ‘친구분 아직 3년 지난 거잖아요.‘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러나 나와 아무 관계도 없는 타인이 용기 내어 건네준 위로인 만큼,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 보기로 했다. 마음먹고 온 덕분인지, 아니면 미용사의 위로 덕분인지, 머리를 미는 내내 울지 않았다.


항암치료 2주 후, 그 짧은 머리카락 마저 전부 빠지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민머리가 되었다. 머리카락이 아예 없어서, 씻을 때 샴푸를 써야 할지 폼클렌저를 써야 할지 고민이 될 지경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숨기기 위해, 가발 없이는 밖을 나서지 않았다. 인조가발은 매일 쓰면 금방 망가져서 자주 바꿔줘야 했다. 기왕 새로 사는 김에 검은색부터 샛노란 색까지 다양한 가발을 시도해 봤다. 그리고 가발색에 맞춰 화장을 바꿔보기도 했는데, 그 모습이 제법 잘 어울리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항암치료 중에 그 어느 때보다도 사진을 많이 찍었다. 사진 속에서 가발을 쓴 나는 참 화려했으니까. 그 사진을 보며 난 항암치료 중에도 여전히 예쁘고, 아직 여자로서의 가치가 남아있다고 믿고 싶었다.


반면 집에서의 모습은 전혀 달랐다. 사진을 찍기는커녕 거울도 보기 힘들었다. 대머리에 칙칙하고 부은 얼굴의 나를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다. 그토록 보잘것없어 보이는 나와 눈 마주칠 자신이 없었다. 부작용이 심한 날에는 하루 종일 누워있는 게 고작인데 집에서까지 머리를 옥죄는 가발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몸이 아픈데 가발이나 화장이 다 무슨 소용인가. 그때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은, 입맛이 없어도 살기 위해 밥이라도 욱여넣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내가 못 견디게 싫었다. 거울을 보고 억지로 미소 지어봐도 도무지 나를 좋아할 수가 없었다. 얼른 이 시기가 흐르고 이전의 모습으로 회복되는 날이 오길 기다릴 뿐이었다.


그런 내가 대머리인 나를 좋아하게 된 건, 항상 그랬듯 한껏 부은 얼굴로 밥을 먹으러 방문을 열었던 어느 오후부터였다. 그날 엄마는 햇살 같은 미소를 머금고 나를 몇 초간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너는 어쩜 머리가 없어도 이렇게 예쁘니?“

민낯의 대머리 행색인데 예쁘다니. 자고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연인 그 자체였는데, 예쁠 리가 없지 않은가. 믿을 수 없지만 듣기는 좋아서 멋쩍게 웃었다. 그 후로도 엄마는 종종 나를 뚫어져라 보고, 머리가 없어도 예쁘다며 감탄하고는 했다.


더 신기한 건 아빠였다. 엄마의 칭찬 후로 한 달여가 지난 어느 날, 문득 아빠도 밥을 먹다 날 한참을 바라보더니 “양별(필명)이는 나 닮아서 머리가 없어도 예쁘네. 허허!“라고 말하며 환하게 웃는 게 아닌가. 나도 그렇지만, 아빠는 듣기 좋은 말을 해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된 지금까지 서로 싸우고 상처 줬던 일이 절반은 줄었을 것이다. 아빠는 살이 찌면 ‘살쪘다‘고, 그 상태로 머리 염색을 했을 때는 웃으며-난 안 웃었다- ‘갈색 돼지 같다’고 했다. 베이비부머 세대인 부모님이 으레 그렇듯, 두 분 모두 다정한 말보다는 사실-이라 생각하는 것-을 말하곤 했다.


어릴 때부터 줄곧 그랬다. 부모님은 ‘너는 살이 쪄도 예뻐. 너는 셀카도 잘 찍네.‘와 같은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해주면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맘에 없는 소리는 절대 해주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알게 모르게 쌓아 올려왔던, 그리고 매번 무너져왔던 기대는 어느덧 서운함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빈말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말했다. ‘너는 머리가 없어도 정말 예쁘다‘고. 그들의 칭찬은 참 강력했다. 그렇다면 믿어봐도 되지 않을까. 아니, 진짜로 믿어보고 싶어졌다. 난 머리가 없어도 예쁘다는 것을.


웃긴 것은, 그 칭찬을 들으면 들을수록 진짜 내가 예뻐 보이는 것이었다. 거울 속의 나는 여전히 민머리에 퉁퉁 부은 얼굴이었는데도, 그 와중에 눈두덩이는 제법 복스럽게 보이는 것이었다. 거울 속의 나와 눈 마주치는 것이 힘들었던 내가, 어느 순간 거울을 보며 꽤나 만족하고 있는 모습이 웃겨서 웃음을 터뜨렸다. 거울로 보이는 살짝 비대칭인 얼굴마저 유난히 조화로워 보였다. 아무리 크게 웃어봤자 얼마나 더 비대칭이 되겠나 싶어 더 활짝 웃어 보였다. 이제 머리카락이 없어도, 얼굴빛이 어두워도, 살이 퉁퉁 부어올라도 좋았다. 나는 그럼에도 예쁘니까.


나는 그렇게 대머리 미녀가 되었다.


항암치료를 마친 지 곧 3년이 되어 간다. 지금은 머리카락이 중단발 정도로 많이 길었고, 얼굴빛과 붓기도 이전과 같은 정상 상태로 돌아왔다. 그때 고민이었던 것이 더 이상 고민이 아니게 되었고, 진단 당시 20대 후반이었던 나는 어느덧 30대 중반이 되었다. 그 사이 낯빛은 또 전과 달라졌고, 미세한 주름이 늘어가는 것을 느낀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내가 예쁘다. 예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광고 속에서 내게 화장품을 사라고 손짓하는 연예인처럼, 맑고 큰 눈, 오뚝한 코, 두툼한 입술, 흠결 없는 피부를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리라. 외모는 사람마다 각양각색으로 빛나는 것이니까.


그렇다면 시간이 흘러 주름이 깊게 파이고, 나이가 들어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가 되고 난 후의 나는 더 이상 예쁘지 않을까. 글쎄. 난 그때 이 기억을 떠올릴 것이다.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을 정도로 힘들었던 항암치료 기간, ‘넌 머리가 없어도 너무 예쁘다’며 환하게 웃어주던 우리 엄마아빠의 놀란 눈빛을. 그리고 언젠가 그 말을 해줄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았을 때에도 나는 내게 반짝이는 눈빛으로 말해줄 것이다. 넌 여전히 참 예쁘다고.


누군가가 말해줘도 믿지 못했던 그 말은, 사실 내가 해줄 때 가장 힘이 세다. 진짜 변화는 내가 그 말을 믿기로 마음먹은 순간에야 비로소 시작되었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앞으로도 내게 끊임없이 말해줄 것이다.

‘나는 한 명의 사람이다. 태어날 때 머리카락이 없었듯 젊어서도 한때 그러했던, 제법 특이한 이력이 있는 사람. 그러나 동시에 살아가기 위한 위대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 어느 모습으로도 사랑받을 만한 보통의 인간이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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