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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일할 줄 알았으면 회사를 차릴 걸 그랬다.

사이드 허슬러

by NULL

직원은 기업의 주인이 아닙니다. 기업이 버는 돈도 주주의 것이지요. 기업과 직원의 긴장관계를 누그러뜨리려는 노력은 언제나 있지만, 그럼에도 이해관계를 온전히 일치하도록 하는 일은 불가능의 영역입니다.

사이드 프로젝트에선 소유와 운영이 일치합니다. 내가 잘하면 그 성과는 오롯이 나의 몫이죠. 물론 실패의 결과도 감당해야 할 짐입니다.

- <사이드 허슬러> 中


새로 오신 처장님이 부서간 업무를 초월하여 관심을 가지고 업무지시를 하는 걸 보며 생각했다. 실무를 모르셔서 담당업무를 헷갈리셨구나. 그런 일이 몇 차례 반복되고 나서 깨달았다. 이것이 주인의식이구나! 실제 처장님은 오너 일가였다. 오너에게는 내 일, 네 일의 구분이 없다. 모두 다 나의 일인 것이다. 나는 살아 숨 쉬는 주인의식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주인이 아닌 나는 화가 났다. 내가 열심히 일해서 회사가 잘 되는 것이 너무 분했다. 내가 남들보다 열심히 일한다고 해서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을 수 있는 회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더더욱 화가 났다. 나는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게 태어난 스스로가 미웠다.

나도 몰랐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직원이 될 줄은. 취업하기 전까지 우리는 우리가 어떤 직원인지 알 수 없다. 이 에너지를 나에게만 집중했다면 지금보다 더 잘 살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아무런 의심 없이 조직으로 뛰어든 것이 뒤늦게 후회됐다.


‘이렇게 열심히 일할 줄 알았으면 내 회사를 차릴 걸 그랬다.’




그래서 나는 나 혼자 일하고, 나 혼자 남겨먹는 일인 기업이 되기로 했다. 오래 전부터 나는 우리 모두가 필연적으로 사업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확신했다. 이대로 가다간 120세까지 살게 된다는 끔찍한 시대다. 은퇴하고 봤더니 앞으로 살아갈 날이 은퇴 전만큼 남아있다. 남은 60년 동안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이 일을 해야 한다. 생계를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남은 60년을 지루하지 않게 보내기 위해 우리에게는 사이드 프로젝트가 필요하다.


주업 외 자신이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새로운 파이프라인으로 키워가는 것을 사이드 프로젝트라고 한다. 직장인 사이드 허슬러라면 대개 회사에서 맡은 업무와 관련한 일을 사이드 프로젝트로 삼는 게 일반적이다. 그래야 해당 분야에 전문성을 갖출 수도 있고, 회사 일을 하는 게 자신의 사이드 프로젝트를 키우는 데도 도움이 된다. 무엇보다 커리어의 단절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탈잉이나 클래스101에서 업무 관련 프로그램 사용 노하우를 강연하거나 책을 출간하는 케이스가 이 유형에 속한다.


업무와 관련된 사이드 프로젝트에 흥미가 있었다면 나도 퇴사를 하지 않고, 회사를 다니며 계속 커리어를 이어가는 게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회사에는 내가 하고 싶은 일과 관련된 분야가 없었다. 보도자료 작성은 내가 원하는 자유로운 글쓰기와는 멀었고, 관심분야를 업무에 자연스럽게 녹일 수는 있었지만 실제 그 일을 하는 건 외주업체였다. 유사 분야에 의욕적으로 임해보려 해도 윗선과 나의 의견 불일치로 사기는 한없이 저하됐다. 결국 회사에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없다고 결론 내렸다.




백수의 사이드 프로젝트 타령이 의아할지도 모르겠다. 주업이 없는 백수니까. 내게는 사이드 프로젝트뿐이다. 이 프로젝트들은 모두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이라 욕심이 과하다는 걸 알면서도 제대로 실행도 하지 못한 채 몇 년째 끌어안고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아마 내 우울증에는 나의 과도한 욕심도 일정 부분 지분을 갖고 있을 게 분명하다.


백수가 되면 일사천리로 진행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백수도 바쁘다. 그래서 나는 각 프로젝트별로 몰입기간을 두고 진행하기로 했다. 학창시절 수업을 듣는 것처럼 매일 조금씩 나눠서 진행하는 방법도 고려했지만, 인생은 늘 예기치 않은 이벤트를 만들어내고 그에 대응하다보면 실현 가능성도 낮고, 무엇보다 흐름이 끊겨 비효율적이다.


일인 기업이 되겠다는 포부에 맞게 나의 사이드 프로젝트는 모두 혼자 작업하거나 소수의 사람과만 일해도 되는 분야로 구성되어 있다. 나에게 일은 잘하지만 재수 없다는 둥, 네가 뭔데 나더러 오라가라냐며 사무실이 떠나가라 소리치던 무례한 동료와 결별할 수 있다. 팀장이 없을 때 자리 비우지 말라는 지시에 장염에도 출근했더니 자신이 불러줘서 보람 있지 않냐는 어처구니없는 말도 안녕이다. 상사가 식사 제안을 할 때는 약속이 있어도 없다고 하는 거라는 시대착오적인 발상도 안녕. 카페인이 받지 않는 내게 사회생활을 하려면 커피도 마시고 그래야 한다며 억지로 카페인을 강권하는 폭력에서도 안녕.

나의 사이드 프로젝트에는 갑과 을이 없다. 오로지 나만 있다. 일 년 동안은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기로 했으니까. 트렌드를 이해 못하는 고루한 안목에서도 프리덤. 하면 안 될 것들과 꼭 넣어야 할 것들로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기획안에서도 프리덤. 물론 덕분에 돈은 못 벌겠지만, 애초에 사이드 프로젝트로 대단한 성공을 거두겠다는 야망도 없다. 파이프라인을 늘려 ‘푼돈 모아 목돈’을 만드는 게 나의 목표다.


책 출간, 웹소설, 이모티콘.

독후감, 서평단, 브런치, 블로그.


앞으로 하나씩 이루어갈 나의 사이드 프로젝트 목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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