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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알을 낳는 거위는 왜 탈출하지 않았을까?

나는 길들지 않는다

by NULL

몇 년 전부터 나는 스스로를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고 생각했다. 내가 생각해도 근자감 쩌는 비유였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봤자 사람으로 치면 일 좀 잘하는 노예일 뿐이다. 심지어 언제 배를 갈릴지 모르는 위험에 항상 노출되어 있는 것이 이 노예의 숙명이니, 일 좀 잘한다는 특성은 결코 자랑이 아니며 따라서 부러워하거나 시기할 것도 못 된다.


현재의 당신은 직장인이라는 신분에 쉽사리 몸을 판 탓에 본래의 모습을 잃고 말았다. 원래 당신은 자신의 자립한 젊음을 연마할 수 있는 다양한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온갖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그런 것을 꼼꼼하게 검토하지 않고 고용인의 길을 선택한 까닭은 그것이 가장 일반적인 코스이며, 현명한 사회인의 길이라고 세뇌를 받았기 때문이다.

- <나는 길들지 않는다>, 직장인이란, 사소한 희망에서 시작해 거대한 절망으로 끝나는 존재 中


스스로 거위라고 생각했을 때 나는 이미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황금알을 낳아도 도무지 만족할 줄 모르는 주인 밑에서 나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지만, 사실 나는 그 뒤로 도금된 은알밖에 낳지 못하는 거위가 되었다. 이대로 가다간 거위알도 낳지 못하는 거위가 될 게 뻔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더 이상 황금알을 낳지 못한다는 건 스스로의 자존감과 정체성을 허무는 위기다. 내가 고갈되고 소진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은 내 몸 안에 있는 장기들이 어느 날 파스스 가루를 내며 사라지는 것을 자신의 눈으로 지켜보는 것과 같다. 죽어가고 있다는 두려움이 나를 엄습했다.

계속해서 몸에 이상이 생겼다고 여기저기 말하고 다녀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 겉으로 봤을 때 너무나 멀쩡해 보이고, 결과물은 언제나와 같이 만족스럽다. 황금알과 도금된 은알의 차이는 그 알을 낳은 거위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거위 혼자만 아는 자괴감이 거위를 서서히 갉아먹는다. 거위가 아픈 건 결국 거위 혼자만 아는 비밀이 된다.

사람들은 거위의 말을 투정이나 꾀병이라고 생각한다. 거위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애초에 믿어줄 마음이 없다. 황금알이든 도금된 은알이든 어쨌든 거위알을 낳거나 아예 못 낳는 것보다는 분명 이득이었다.


당신이 가정과 자존심을 전부 희생해 가며 시중을 들고 주인의 돈벌이에 공헌하면 ‘우두머리 노예’ 정도로는 출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노예는 어디까지나 노예이다.

- <나는 길들지 않는다>, 아무리 충성해도 노예는 언젠가 버려진다 中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아프다는 걸 인정하면 남아있는 거위들이 낳은 알에 금칠을 하거나 아예 알을 낳지 못하는 거위들을 대신해 그들이 직접 알을 낳아야 한다. 그런 수고로움을 감수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고통을 모른 척하는 것이 훨씬 편하다. 언제까지?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를 때까지 이러한 착취는 멈추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황금알을 낳을 수 있도록 좋은 환경을 조성해줬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언제나 황금알을 낳는 거위에게 썩어빠진 보금자리와 싸구려 사료를 제공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는 그런 환경에서도 황금알을 낳는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렇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는 거적때기에서 자도, 똥을 먹어도 황금알을 낳는다. 왜냐면 원래 황금알밖에 못 낳게 태어났기 때문이다.

아늑한 보금자리와 고급 사료는 거위알조차 낳지 못하는 거위들에게 제공된다. 이유는 알을 못 낳는 거위에게까지 신경을 쓰는 게 너무 번거롭기 때문에 아예 신경 쓸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한 장치를 마련한 것뿐이라거나 그 거위가 있는 자리는 원래 고급 사료밖에 못 들어가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따위의 것들이다.

부조리함에 항의하면 돌아오는 답은 “그럼 너도 알 낳지마.”, “너도 적당히 거위알만 낳고 살아.”이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그렇게 살면 심하게 앓게 된다. 반대로 심하게 앓아야지만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거위알을 낳거나 아예 알을 낳지 않을 수 있다. 한마디로 그런 말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에게 앓아죽으라는 말과 다름없다.

만에 하나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정말 심하게 아파서 알을 낳지 못하게 된다면 그때라도 사람들의 보호를 받을 수 있을까? 이미 황금알을 낳을 줄 아는 거위라는 걸 알고 있는데 사람들이 거위를 가만히 내버려둘 리가 없다. 그들은 거위의 부리로 독한 약을 주입하고 계속해서 일하기를 강요할 것이다. 결국 거위는 생각하는 법을 잊어버리고 기계적으로 황금알만 낳는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그리고 더 이상 약조차 들지 않는 상태가 되면 마침내 그들은 거위의 배에 칼을 들이민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최후는 언제나 배가 갈리는 것이다.




‘언젠가 내가 우울증 때문에 더 이상 알을 못 낳겠다고 하면 그들은 내 부리를 벌려 약을 투여하고 계속해서 일하라고 하겠지.’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우울증으로 휴식을 요구하는 내게 일하면서 치료받으면 안 된다는 근거가 없다면 끊임없이 새로운 서류를 요구했다. 내 정신상태가 어찌 되었던 간에 약을 먹고 일하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전체 생산성에 지장이 있기 때문이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보았다. 보금자리와 사료에 대한 처우 개선도 요구해보았고, 자신이 휴식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것도 알렸다. 하지만 어느 것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제 거위에게 남은 건 썩어빠진 보금자리에서 싸구려 사료와 항불안제, 항우울제를 먹으며, 마지막까지 황금알을 낳다가 배가 갈린 채 생을 끝내는 것뿐이다. 절망에 빠진 황금알을 낳는 거위는 거적때기 위에 누워 멍하니 생각한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는 왜 탈출하지 않는 걸까?”


사실 대부분의 황금알을 낳는 거위는 이런 환경에서 탈출한다. 그렇기 때문에 거위농장에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점점 희귀해진다. 그리고 남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는 탈출한 거위들의 몫까지 짊어져야 했다. 때문에 황금알을 낳는 거위들의 삶은 갈수록 고단해질 수밖에 없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탈출해야 한다. 농장 안은 전쟁터고 농장 밖은 지옥이라는 말은 거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당장 전쟁터에서 총 맞아 죽게 생겼는데, 지옥의 수레를 굴리는 일이 대수겠는가. 죽음의 위기에서는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이 최우선이다.




이쯤에서 거위는 야생에서 사활을 걸고 먹이를 구하는 동물들에 비하면 동물원에 있는 게 동물들에게는 잘된 일이라고 했던 과거의 말을 반성했다. 좁은 동물원 안에서 이상행동을 하던 동물들의 모습도 떠올랐다. 만족스럽지는 못할망정 어쨌든 거위농장에는 먹을 것과 잠잘 곳이 제공되고 있었다. 과거에 자신이 했던 말대로라면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는 농장 밖으로 나가는 건 미친 짓이었다. 그런데 그 미친 짓을 지금 하려는 것이다. 정말로 미치지 않기 위해서, 살기 위해서 황금알을 낳는 거위는 탈출을 감행했다.


혼란스러운 처음 단계를 참고 견뎌 무사히 이겨 내면,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미래이기에 거기에 삶의 가치가 있고, 하루하루가 즐거운 그 두근거림이 자립한 젊음의 원천이 된다는 사실을 절로 깨우칠 것이다.

- <나는 길들지 않는다>, 산 자로 살고 싶다면 자영업에 뛰어들어라 中


몇 차례 붙잡힐 위기가 있었으나, 거위는 탈출에 성공했다. 다행히 야생은 듣던 것만큼 험난하지 않았다. 넉넉하지 않지만 좋아하는 먹이를 먹을 수 있고, 작기는 해도 스스로 만든 둥지도 만족스러웠다. 다 먹지도 못해 쌓아두었던 싸구려 사료와 거적때기 보금자리보다 농장 밖의 삶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는 다시 황금알을 낳기 시작했다. 이제 알에는 농장 스티커가 아닌 거위가 직접 만든 조악한 스티커가 붙었다. 똑같은 황금알이건만 농장에 비해 이제 막 시작한 거위의 인지도가 떨어지는 탓에 예전만큼 잘 팔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언젠가 세상이 알아주는 날이 올 것이다. 농장에서 낳았던 도금된 은알보다 지금 낳고 있는 황금알이 더욱 가치 있다는 것을 인정받는 날이 올 것이라고 거위는 굳게 믿었다.




만약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이 이야기의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고 생각한다면 살아남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다른 황금알을 낳는 거위들처럼 적당한 때에 농장을 탈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는 걸 사람들에게 영원히 들키지 않는 것이다.


들키지 않기 위해 당신이 해야 할일은 자신이 낳은 황금알이 평범한 거위알로 보이도록 칠하는 일이다. 황금알을 낳을 수 있는 능력을 영원히 숨기고, 심지어 평범하기 위해 위장하는 수고로움까지 감수하면서 농장에 남고 싶은가? 아마 그러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들이 탈출하거나 배가 갈릴 때까지 황금알을 낳다가 생을 마감한다.


어떤 선택을 하든 당신을 응원한다. 다만 무엇을 선택하든 당신은, 당신 자신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걸 절대 잊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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