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은 내가 결정합니다
“저… 고장 난 것 같아요….”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 눈가에 가득 고인 눈물, 휘청거리는 몸. 모든 게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 전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회사에 앉아 있는 게 너무 힘들어 갑자기 휴가를 내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야 했던 평범한 날 중 하나였을 것이다. 내 앞에 선 팀장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뭐? 나더러 뭘 어쩌라고?’
라는 말과 함께. 그는 중병에 걸려 패닉상태였던 팀원에게도 그랬다. 그런 사람에게 저따위의 헛소리를 지껄였던 걸 보면 그때 나는 확실히 고장 났던 게 분명했다. 당시의 나는 “날씨가 너무 좋죠?”라는 말에도 울었다. 식탐도 없는데 이상하게 가족 외식장소를 정할 때도 울었다. 그것도 두 번이나. 본가에 내려왔다 다시 서울로 돌아가기 위한 짐을 싸는 동안에도 계속 울었다. 회사에서는 울면서 일했고, 혼자서는 툭하면 울었다. 이 상태로 워크숍에 갔다가는 회사 전체에 내 상태가 이상하다, 소문날 일이 생길 것 같아 입사 후 처음으로 워크숍에 불참했다.
병원에 처음 방문하는 분들은 대부분 신체적 증상으로 인한 불편 때문에 병원을 찾아온다. …(중략)… 어떤 분들은 이러한 신체적 증상을 억제하는 약만 처방해달라고 한다. …(중략)… 그러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이 증상의 기저에 있는 원인을 알아야 한다.
- <내 마음은 내가 결정합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생각은 어디에서 올까? 中
우울증의 시작은 눈앞이 도는 증상으로 시작됐다. 어느 날 갑자기 눈앞이 뱅글뱅글 돌아서 모니터의 글씨를 읽을 수 없었다. 증상은 한쪽 눈에만 나타나 한동안 짝눈으로 일했다. 스트레스를 견디는 강도도 현저히 떨어졌다. 욕하고 소리 지르는 민원인의 전화에 심장이 심하게 두근거렸다. 이전이라면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일에 이런 증상이 나타나니 당황스러웠다.
언젠가부터 회사에 앉아있는 것 자체가 힘들어졌다. 컨디션 난조를 이유로 나는 툭하면 계획에 없던 휴가를 냈다. 출근하던 중에 미주신경성실신 증상의 전조가 보여 지하철에서 중도하차하는 바람에 출근도 덩달아 중도하차하는 일이 이따금 생겼다. 그해 입사 후 처음으로 휴가 부족을 겪었다. 출근하기 싫으니 자연스레 지각도 늘었다. 삼 년 내리 퇴사 의사를 밝혔으나, 퇴사는 쉽지 않았다. 회사에서는 업무를 줄여주거나 희망부서로 이동시켜주기도 했지만, 괜찮아지는 건 잠깐뿐이었다. 우울증은 끈덕지게 내 뒤통수에 따라붙어 떨어질 줄 몰랐다.
수면장애와 두통에 시달리다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상태에 이르러서야 병원을 찾았다. 타이레놀로도 가라앉지 않던 두통이 순식간에 잠잠해지면서 그날은 모처럼 깊이 잠들 수 있었다. 문득 무슨 약인지 궁금해져 처방전에 적힌 ‘삼진디아제팜정2mg’이란 약품명 검색했다. 신경안정제, 정확히는 항불안제였다.
처방된 약을 모두 복용한 뒤엔 수면장애에 좋다는 마그네슘 영양제를 구입했다. 그때까지 나는 두통을 수면장애로 인한 복합증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수면장애도 두통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약을 끊은 이후 서서히 올라오던 두통이 열흘 후 절정에 이르렀다. 오후에 중요한 회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양해를 구하고 퇴근 후 병원으로 향했다.
[D-21]
“제가 정신과에 가야 하는 상태인가요?”
증상을 이야기한 후 나는 의사에게 이 질문을 덧붙였다. 의사는 나에게 나타나는 증상들이 스트레스로 인한 신체화증상이라며,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정신과에 가보는 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했다. 마침 휴가도 냈다고 하니 오늘 가보는 게 좋을 것 같다며 약 처방은 하지 않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의사에게 정신과 병원을 추천 받은 후 거리로 나왔다. 두통으로 많이 지친 상태라 진료를 미루고 싶었지만, 정신과에는 다음에 갈 테니 오늘은 약을 처방해달라는 말을 꺼낼 기운조차 없었다.
‘그냥 집에 갈까?’
쉬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오늘도 잠들지 못할 것이고, 내일도 두통에 시달릴 게 뻔했다. 중요한 회의까지 불참하고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 회사로 돌아가는 건 무책임해 보였다. 그리고 의사 말대로 오늘 가지 않으면 정신과에 가는 걸 계속 미루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무엇보다 약 때문에라도 병원에 가야 했다.
내가 괴로운 것은 내 주위를 둘러싼 상황 때문이 아니었다. 머릿속 생각의 뿌리 때문이었다. 내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생각의 뿌리가 스스로를 억압하게 만든 것이다.
- <내 마음은 내가 결정합니다>, 우리가 쉽게 빠지는 생각의 함정 中
당시 내 상태는 최악이었다. 나는 의사와의 상담에서 넋이 나간 사람처럼 횡설수설했고, 의사가 던지는 질문 세례에 혼란스러워 했다. 한 시간 동안 많은 이야기가 오갔지만 기억나는 건 딱 한 가지였다. 내가 회사를 그만두지 못하는 건 부모님의 기대 때문이 아니라 퇴사 후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이라는 의사의 해석이었다. 그는 심지어 그런 나의 불안이 나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고, 자신에게 투사되어 자신이 그 불안을 느낀다고 말했다.
정말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부모님이 반대하지 않는다면 나는 지금이라도 사직서를 내고 싶었다. 나는 의사의 말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가족들에게 곧장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의사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가족들은 나의 퇴사를 반대하지 않았고, 나는 나의 미래를 그 정도로 불안해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D-20]
가족들의 권유로 다음날 다시 병원을 찾아 진단서를 발급 받았다. 회사에는 진단서를 근거로 휴직이 가능한지 문의했다. 본격적인 치료는 가족들이 있는 본가에서 진행할 계획이므로, 휴직이 불가능하면 퇴사하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정신과 문제로 휴직을 신청한 케이스는 처음이라 일처리는 시작부터 삐걱댔다. 8개월 전 이미 워크숍 불참으로 우울증세가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첫 진료시기를 들먹이며, 진료를 받자마자 휴직을 결정하는 건 너무 즉흥적이라고 말했다. 1차 병원에서 발급된 진단서도 시빗거리가 됐다.
다리가 골절됐다는 진단서를 동네병원에서 발급 받았다고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하는 회사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신과는 동네병원에서 진단서를 발급 받으면 상급병원 진단서를 요구하는 일이 만연하다. 심지어 그 동네병원 의사가 대학병원 근무 경력이 있으며, 보직까지 맡았던 의사여도 현재 소속이 동네병원이니 인정해주지 않는다. 실제 내가 다녔던 병원 두 곳 역시 대학병원 근무 경력자였으며, 처음 진단서를 받았던 병원의 의사는 과장 보직을 맡았던 사람이었다.
대형병원에도 정신과 전문의를 한 명만 두는 곳이 있는 판국에 1, 2차를 가르는 경계는 더욱 모호해서 사실상 구분이 불가했다. 이 와중에 의뢰서를 받아 3차 병원에서 진료를 받으려면 한 달 뒤에나 진료예약이 가능했다. 나는 대기에만 한 달이 걸리는 3차 병원 진단서는 못 받아오겠으니 퇴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나의 ‘퇴사하겠다’와 팀장님의 ‘더 알아보겠다’의 반복만으로 일주일이 지났다. 회사가 휴직은 승인해주지 않을 거면서 시간만 끌고 있다고 느낀 나는 내일은 사직서를 내겠노라고 말하고 퇴근했다. 하지만 그날 저녁, 병중에 있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D-13]
우리는 언제든 죽을 수 있기에 미리 죽음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만 진정한 의미의 자유와 만날 수 있다.
- <내 마음은 내가 결정합니다>, 한때 소중했던 사람들을 떠나보내야 할 때 中
어느 날 문득, 내 인생에서 가장 먼저 이별할 사람이 외할머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이후 외할머니를 뵐 일이 있을 때는 반드시 뵙고 매번 용돈도 드렸다. 언젠가 외할머니를 보내게 되는 날이 올 때 후회 없이 보내드리기 위한 나만의 의식이었다.
그러나 외할머니를 뵐 마지막 기회가 주어졌을 때, 나는 외할머니에게 가지 못했다. 그때 나는 가족 외식 장소 문제로 울기 시작해 며칠을 우울해 하고 있어 외할머니를 뵐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우울증이 아니었다면 그날 외할머니를 만났을 텐데. 매번 오던 손녀가 오지 않아 그날 외할머니가 나를 찾지는 않았을까.
쓰러지신 후 반신마비와 언어장애로 몸을 마음대로 가누지 못하면서도, 찾아오는 식구들을 반기는 환한 얼굴에 더욱 마음이 아려 평소에도 외할머니를 보면 눈물이 났다. 우울증이 깊은 날에 외할머니를 만나면 내가 어떻게 될지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나는 외할머니를 볼 마지막 기회를 우울증으로 놓쳤다.
장례식장엔 백여 개의 화환이 빽빽하게 들어섰다. 회사에서 보낸 화환이 입구에서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놓였다. 입사 후 처음 수당을 받아 엄마에게 금팔찌를 해준 후 처음으로 회사에서 받은 무언가가 엄마의 자랑이 되었다. 갑작스런 사고로 아버지를 여읜 지인이 남편이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는 말을 했을 때 결혼을 심각하게 고민했던 것처럼, 장례식장에 놓인 화환을 보며 퇴사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하지만 장례를 모두 마친 뒤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싸면서부터 터진 눈물이 모든 고민을 덮어버렸다. 아버지는 터미널에 내릴 때까지 끅끅대며 울고 있는 내게 부모형제 다 있는데 무슨 걱정이냐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내려오라고 말했다.
[D-9]
복귀 후 ‘퇴사하겠다’와 ‘더 알아보겠다’가 다시 반복됐다. 다니던 병원의 소견서를 첨부하여 휴직원을 내는 것으로 최종 합의하고, 대신 퇴사가 됐든 휴직이 됐든 마지막 출근일 이후에는 남은 휴가를 붙여 소진하기로 했다. 퇴사 시 필요한 서류를 미리 마련해 팀장님에게 전달했고, 업무분장을 새로이 했다. 광고와 홍보 업무 담당자가 나뉘어졌으니 각자에게 인수인계하면 되냐는 물음에 내가 담당하는 홍보 업무가 있었냐는 황당한 질문이 돌아왔다.
나에게 분장됐던 홍보업무 중 상당 부분을 그 업무를 희망하는 다른 팀원들에게 분장하긴 했지만, 여전히 나에게 자질구레한 관리업무가 남아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작성하고 진행했던 기획안들은 무엇이며, 관리라는 이름의 책임은 무엇이었을까.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혼자서만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며 관리하는 일에 나는 그동안 왜 그렇게 부담을 느끼고 열을 올렸던 걸까.
[D-3]
장고 끝에 회사에서 내린 결론은 처음과 같았다. 3차 병원 진단서 및 소견서 첨부. 제출한 자료만으로는 내 병증이 업무와 병행하여 치료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인지 판단할 수 없으며 다른 계통의 병증과 달리 보통의 기준으로는 판단이 어렵다는 게 이유였다. 덧하여 휴직 신청기간 산정근거 -완치를 위한 기간인지, 치료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위한 기간인지- 에 대한 의사 소견을 추가로 요청했다.
그렇게 상세한 소견서를 작성해주는 친절한 의사가 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게다가 행정적으로 필요한 절차일 수는 있지만, 내가 본격적으로 치료를 받을 병원은 이곳이 아니었기에 여기서 나오는 계획들은 모두 무의미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우울증 치료를 오로지 병원에만 의지할 생각 역시 없었다.
무엇보다 본가에 내려가 가족의 보호 아래 치료 받고 싶다는 나의 의견이 완전히 묵살됐다. 자살 직전 단계인 ‘중등도 우울 에피소드’라는 병명에도 계속 회사를 다니며 치료하라는 회사의 잔혹함에 가족들은 경악했다. 나는 곧바로 시스템에 미리 등록해뒀던 사직서를 제출했다.
[D-1]
시한부라는 진단을 받고 나서야 원하던 대로 살겠다는 것은 거꾸로 생각하면 ‘살아 있는 기간’에는 그러지 못한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 왜 ‘죽는데 누가 뭐라고 그래요’라고만 생각하는가. ‘내 인생인데 누가 뭐라고 그래요’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맞다.
- <내 마음은 내가 결정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선택할 자유 中
“퇴사 결정 잘한 거 같아요.”
나중에 내가 퇴사를 후회하게 되지 않을까 염려하던 팀원들은 마지막 출근일에 최근 본 중 가장 얼굴이 밝다며 걱정의 잔여물을 훌훌 털어냈다. 온전치 못한 정신으로 뒤늦게 퇴사 소식을 알리게 되어 그 후로도 일주일간 나는 회사 주변을 기웃대며 사람들을 만나고 작별인사를 나눴다. 밖에만 나오면 기력이 소진되는 통에 힘들었지만, 좋은 사람들과 일했다는 추억을 주렁주렁 남기며 그렇게 나의 서울생활의 마지막장을 닫았다.
[D+123] 퇴사를 후회하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전혀. 매우 만족스럽게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