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궁을 가진 우리의 원죄
"엄마가 좀 도와줘"
정말 뻔뻔해졌다. 결혼 전만 해도 "부모에게 아이를 맡기는 그런 나쁜 딸년은 되지 않을거야"라고 큰 소리치던 나였다. 하지만 "어떻게 아이를 키울거니"라고 한숨 쉬며 묻는 엄마에게 나는 그저 '도와달라'고 말했다.
아이를 어떻게 키울건지는 우리 부부의 최대 화두였다. 이미 친정엄마는 아들이 둘 있는 여동생의 돌봄노동에 동참하고 있다. 환갑이 넘어 2년 연속 갓난아기를 돌보다보니 원래도 성치 않았던 건강상태는 더욱 엉망이 됐다. 그런데 '아이를 절대 낳지 않겠다'고 평생 외치던 큰 딸이 쌍둥이를 가졌다니. 친정엄마는 너무 좋아 기뻐하다가도 종종 정색하며 묻는다.
너는, 쌍둥이를, 어떻게, 키울거니.
딸 says: 방법이 없어 엄마
그러게, 엄마. 나는 얘들을 어떻게 키우지?
많은 딸들이 친정엄마에게 자녀의 돌봄노동을 고스란히 맡긴다. 베이비시터라는 직업이 있는데도 말이다. 딸들이 베이비시터를 고용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대개 돈 때문이다. 베이비시터 시세는 한 달에 150만~200만원 수준이다. 그들의 노동 강도에 비해서는 터무니 없이 낮은 저임금이지만 월급쟁이 입장에서는 거의 한 사람의 한 달 월급 수준이다. 많은 여성들이 출산 후 일을그만두는 이유다. 경제적 이유로 직장에 다니고 있는 경우 굳이 월급을 다 써가며 내 아이를 남에게 맡길 이유가 없다.
하지만 모든 게 돈 때문은 아니다. 말 못하는 갓난아기를어린이집 혹은 베이비시터에게 맡겼다 봉변을 당한 사건 사고가 연일 뉴스로 나온다. 세상의 모든 보육교사나 돌봄노동자가 나쁜 사람은 아니다. 좋은 분들이 훨씬 많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내 자식이 그 나쁜 운에 걸려들 수 있다. 딸은 '미안함' '속상함' '죄스러움'과 같은 모든 감정을 뒤로 하고 뻔뻔해질 수밖에 없다. 내가 나쁜 딸로 질타받는 게 내 자식을 불행한 사건의 희생양이 되게 하는 것보단 훨씬 낫지 않나.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겨도 수시로 발생하는 이벤트에 대응할 사람은 필요하다. 예컨대 아이가 아프면 어린이집에서 아이 엄마에게 "아이를 데려가라"고 전화를 건다. 면역력이 약한 아이들이 모여있다보니 작은 병도 전염된다. 하지만 직장인인 엄마가 아이 때문에 어린이집에 한달음에 달려가는 건 쉽지 않다. 결국 딸은 또 다시 친정엄마에게 SOS를 청한다.
등하원도 마찬가지다. 어린이집은 5시께 끝나지만 직장은 7시가 돼도 엄마아빠를 집에 보내주지 않는다. 누군가는 아이를 집에 데리고 와 돌봐줘야 한다. 요즘은 이런 부모들이 '하원도우미'를 고용하기도 하지만 말 못하는 아이를 덜컥 맡길 만한 모르는 사람을 찾는 건 결코 쉽지 않다. 주변에는 도우미 구하는 데만 1년의 시간이 걸렸다는 지인도 있다. 아이 엄마가 까다로워서일까. 아니다. 내가 없을 때 아이를 맡아 돌봐줄 믿을만한 사람을 찾는 건 그만큼 예민하고 어려운 일이다. 나만큼 아이를 사랑해줄 수는 없겠지만 그런 마음을 보여줄 사람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여러 단계를 거친 딸의 시선은 친정엄마를 향할 수밖에 없다.
엄마 says: 나도 노인이야
시선이 머문 곳에 앉은 엄마의 표정은 슬프다. 환갑이 넘은 노년 여성이 손자, 손녀를 돌봐주는 베이비시터 노동을 하는 이유는 다른게 아니다. 그저 내 딸이 고생하기 때문이다.
사실 돈이 필요하다면 일거리를 찾아도 된다. 그러면 원치 않을 때는 언제든 그만둘 수 있고 근무 시간도 예측 가능하다. 고용주의 상황과 관계없이 급여는 일정하고 쉬고 싶은 날에는 쉴 수도 있다. 정당한 계약에 따른 '고용-피고용'관계기 때문이다.
황혼의 돌봄 노동은 그렇지 않다. 손자, 손녀는 너무 예쁘고 사랑스럽다. 내 딸이 낳은 아이인데 오죽하랴.
하지만 이 관계에 노동이라는 단어를 대입하면 얘기가 다른다. 이 노동은 퇴사 시기가 명확하지 않다. 딸은 언제까지 회사에 다닐 계획일까. 이 갓난아기는 언제쯤 할머니와 엄마의 손길 없이 혼자 지낼 수 있는걸까.
나는 대학 졸업 후에도 고시공부를 하고 대학원에 다니느라 한참을 돈을 벌지 못했다. 아흔 살이 넘은 나의 외할머니는 어느 날 집에 찾아와 손녀인 나에게 "공부 좀 그만 하고 취직을 하라"고 말씀하셨다. 1917년생인 외할머니 입장에서는 곱게 키운 막내딸이 자식 학비를 댄다고 25년이 넘게 새벽에 나가 새벽에 퇴근하며 일하는 모습을 보기 힘들었던 게다. 그 때는 외할머니가 야속했지만 친정엄마와 똑같이 워킹맘이 될 예정인 지금은 그 말을 충분히 이해한다.
친정엄마 입장에서 딸은 고용주다. 하지만 이 고용주는 동시에 한때 내 분신과도 같은 아기였다. 내가 집에 돌아가고 나면(퇴근하면) 직장에서 퇴근한 내 딸이 육아현장에 다시 출근해야 한다. 내 딸은 언제 쉬는걸까. 고용주에게 이런 이해 못할 감정이입을 하는 게 황혼돌봄육아의 본질이다.
하지만 친정엄마는 노인이다. 노동을 진행하다보면 보람찬 손자손녀돌보기는 자연스레 우울함과 짜증으로 바뀐다. 먹지 않는 아이를 억지로 먹여야 하고 잠들지 않는 아이를 안고 업어 재우는 일은 30대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나의 친정엄마는 둘째 딸 집에서 생전 처음 남자아기를 돌보다 손목이 망가졌다. 딸만 둘 키운 친정엄마 입장에서 남자 갓난아기를 키우는 일은 경험해 보지 못한 강도의 노동이다. 실제로 환갑, 칠순이 넘은 노인들이 점점 무거워지는 아이를 안고 있다가 손목이 나가거나 무릎이 아파지는 일은 너무나 흔하다.
왜 세상은 나와 엄마에게만
나는 아직 엄마가 아니고, 황혼돌봄노동은 더욱 내 일이 아니다. 나는 여전히 딸의 입장이고 미안하고 죄스럽지만 엄마에게 맡기거나 위험을 감수하고 베이비시터를 고용하는 일 말고는 다른 육아 방법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 불합리하다. 왜 이런 고민을 나와 엄마만 해야 하는걸까.
아이가 아플 때 어린이집 선생님은 왜 엄마에게만 전화하는걸까. 왜 늘 아픈 아이를 데려가야 하는 사람은 맞벌이 부부 중 아빠가 아닌 엄마일까. 사실 많은 맞벌이 워킹맘이 이런 상황에서 아빠를 불러내 아빠의 사회생활에 차질이 발생하는 걸 원하지 않는다고 한다. 잘 교육받은 엄마들마저도 가부장적 사고에 녹아들어서일까? 결코 아니다. 누군가는 안정적으로 돈을 벌어 가계를 유지해야 하고, 두 사람 중에 회사에 안정적으로 오래 남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은 엄마가 아닌 아빠이기 때문이다.
이미 사회는 아이 돌봄을 엄마의 일로 전제하고 있다. 효율성을 중시하는 기업은 많은 중요한 일거리에서 워킹맘을 배제한다. 커리어를 돋보이게 할 수 있는 중요한 프로젝트는 워킹맘에게 가지 않는 경우도 많다. 기업은 많은 여성직원을 '언제든 아이 때문에 일을 그만둘 수 있는 사람'으로 대우한다. 아이를 키우는 데는 20~30년이 걸리는데 그 기간 동안 부모의 경제활동은 이어져야 한다. 엄마가 성차별적 사회에 맞서겠다며 "우리 가정은 아빠가 육아를 주도하겠어"라고 나서기 쉽지 않은 이유다. 그저 자식을 안정적으로 키워내기 위해서 사회와 타협해야 한다.
아빠의 육아휴직은 어떨까. 이런 편견 가득한 사회에서 아빠가 과연 육아휴직을 쓸 수 있을까. 아빠가 육아휴직을 1년 쓴 사례는 여전히 드물다. 아빠들이 엄마만큼 자식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일까. 아니다. 기업이 그런 남성직원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의 시선에 반하는 '튀는 행동을 하는 남성 직원'은 승진에서 뒤로 밀려나기 쉽고 회사가 위기에 빠지면 가장 먼저 쫓겨날 대상이 되기 마련이다. 40대가 되면 퇴직을 권유받는 불완전고용 시대에 아빠는 세상이 원하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내가 낳은 아이들을 온전히 키워내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고 그 돈을 주는 사람들의 생각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씁쓸하지만 현실이다.
엄마가 잃을 게 없다면
남편과 나는 임신 전 아이가 일정 수준으로 클 때까지는 두 사람 모두 사회생활을 일정 부분 희생하고 육아에 집중하기로 합의했다. 남편이 이에 동의해줬기 때문에 아이를 갖겠다고 결심할 수 있었다. 친정엄마와 시어머니, 양가 어머니의 도움을 받겠지만 돌봄노동 자체는 베이비시터에게 맡길 생각이다. 부모님께 용돈이라도 드리다보면 당연히 비용은 더 많이 들겠지만 사회생활을 지속하고 싶은 내 욕심 때문에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이는 남편의 직업이 일반 회사원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이례적 사례다. 앞서 말했듯 대부분 남편은 본인이 원해도 사회생활을 희생하기 어렵다. 사회가 그런 직원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물며 이미 두 딸의 돌봄노동을 하고 이제서야 휴식을 하고 있는 칠순이 넘은 시어머니가 육아에 동참해줄지도 의문이다. 그리고 시어머니도 노인이다. 이 역시 못할 짓이다.
그런데도 세상은 자꾸 '저출산'을 운운하며 여성들에게 자궁 사용을 강요한다. 아이를 키우는 기쁨이 어떤 건지 경험해보지도 못한 여성들에게 너무 많은 삶의 일부를 포기하라고 말한다.
우리나라 출산율은 세계 최저 수준인 1.05명이라고 한다. 선진국 반열에 올라선 나라에서 이렇게 여성들이 아이 낳기를 거부하는 이유는 그저 돈이 없거나 제도가 미비해서일까. 만약 출산과 육아 후에도 여성이 잃을 게 별로 없다면 어떨까.
열심히 공부해 대학을 나와 어렵게 취직해 쌓은 커리어를 100%는 아니어도 잘 유지할 수 있다면 아이 낳는 기쁨이 어떤건지 궁금해서라도 한 번 아이를 낳아보고 싶지 않을까. 어찌됐든 신체 기관 중 일부가 2세를 낳는 기능을 하도록 고안돼 있는데 그 기능을 한 번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서라도 경험해보고 싶지 않을까.
많은 30대 여성들이 같은 대학에서 캠퍼스 커플로 만난 남성과 결혼한 후에 비로소 세상의 성차별을 경험한다고 한다. 분명 같은 스펙을 가졌는데도 아이를 낳은 후 남편만 정상적인 직장생활이 가능한 현실을 깨닫는 것.
그래서 지금까지처럼 더 열심히 살기 위해 '엄마'인 여성은 다시 '엄마'를 찾는다. 이기적이고 부조리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다. 이런 불합리한 희생이 '나의 친정엄마'에게서 끝나기만을 바랄 뿐이다. 내 딸이 서른이 됐을 때는 세상이 모성을 무기로 딸 자신의 인생 일부를 포기하도록 강요하지 않았으며 한다. 단지 신체의 일부가 2세를 낳는 일을 하는 구조로 고안됐다는 이유로 더 많은 사랑을 보여줘야 하는 건 아니니까. 그거야 말로 다르게 태어났다는 이유로 차별받는 거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