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불어오는 날에...

<바람이 좋아요>. 최내경. 2008.

by 꿈꾸는 카프카

한 여름... 뜨거운 뙤약볕 아래를 거닐고 있노라면 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청량한 바람 한 줄기가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그러다 운 좋게 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길이라도 만나게 되면 잠시 망설일 틈도 없이 우리는 발걸음을 나무 아래로 옮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 멀리 어디선가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한 자락...


'아... 어디 있다가 이제야 나타났니...'


평소에는 그 존재 자체를 인지하지도 못한 채 살아가다가 문득문득 어느 순간에 그 존재의 위압감 앞에, 혹은 그것을 대하는 자신의 무심함을 발견하고서는 놀랄 때가 있다.


'바람'

나에게 '바람'은 자연이 가져다주는 가장 고마운 선물임과 동시에 그것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순식간에 나를 공포로 몰아넣을 수도 있는 가장 무시무시한 존재이기도 하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저하된 면역력 상태로 인해 호흡기가 약해지면서 나는 에어컨이나 선풍기 같은 인공적인 바람을 잘 쐴 수 없게 되었다. 그런 내게 있어 한 여름 더위와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숲에서, 혹은 바다에서, 또 공원 속 나무 사이에서 불어오는 바람뿐이다. 언제부턴가 인공적인 것들에 익숙해진 우리는 그만큼 견뎌내는 힘에도 약해져 조금만 더위가 찾아와도 바로 선풍기나 에어컨을 찾게 되는 문명의 노예가 되어버리고 만 것 같다. 그런 상황 속에서 나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러한 문명의 이기(利器)를 활용할 수 없는 이를테면 '미개인'이 되어버리고 말았으니... 그래서 난 대중교통이나 공공장소를 이용할 때 본의 아니게 다른 '대중'들에게 불청객 아닌 불청객이 되기도 한다. 이를 테면 버스를 탈 때 나는 웬만해서는 내 자리에서는 에어컨을 잘 틀지 않는다. 대신 창문을 열어 자연 바람으로 더위를 식히려고 한다. 그렇다 보니 뜻하지 않게 내 앞, 뒤 자리 승객들에게 불편을 줄 때도 있고 어쩔 때는 기사 아저씨께 왜 혼자 창문을 열어놓느냐고 꾸중 아닌 꾸중을 들을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내 특수한 상황을 설명해야 한다는 번거로움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자연 바람을 좋아하고 그래서 웬만큼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이상 내 소신껏 행동하자는 주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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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 나가서도 이 정도이니 집에서는 더 이상 말할 나위 없이 나는 내게 허용된 이 자연의 선물을 적극 활용하고자 한다. 다행히 우리 집은 양 옆으로 각각 베란다 문과 바깥으로 통하는 다용도실 창문이 놓여 있어서 맞바람이 잘 들어오는 편이다. 아무리 더운 한 여름이라고 할지라도 양 옆의 두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노라면 선풍기나 에어컨은 감히 흉내도 못 낼 시원하고 청량한 바람이 집안을 휩싸고 돈다. 그럼 그 바람은 곧 집안을 한 바퀴 돈 뒤 뜨거운 나의 몸을 식혀주고 나서는 눅눅한 집안의 공기와 젖은 빨래의 습기마저 잠식시켜 주기도 한다. 물론 어느 순간부터는 미세뭔지다 뭐 다해서 이런 자연 바람 또한 100% 다 신뢰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게 아쉬운 점이기는 하나 그것을 감수하고서라도 난 천연의, 자연의 바람을 즐기고 있다.


그리고 여기, 내가 이렇게 바람에 대한 고마움을 다시금 떠올릴 수 있도록 만들어준 기특하고 대견한 책 한 권이 있다.

최내경의 <바람이 좋아요>. '통이'라고 불리는 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본 바람의 이야기를 담은 이 책은, 사느라, 버텨내느라 바쁜 우리 어른들의 삶 속에서 자칫 잊고 지나치기 쉬웠을, 아니, 어쩌면 전혀 생각지도 못해 봤을 바람의 소중함에 대한 이야기를 따스한 삽화와 함께 우리에게 들려준다.

몇 장 안 되는 이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정말 바람이 이렇게나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가까이 머무르고 있었나 싶다. 통이에게 있어 바람은 바람개비를 돌아가게 해 주는, 혹은 민들레 씨앗을 멀리 실어다 날라주기도 하는, 또한 바다의 파도를 땅으로 밀어다 주기도 하는, 더불어 뭉게구름이 떠돌아다니게 도와주기도 하는 참으로 기특하고 대견한 친구이다. 하지만 나에게 그랬듯 어린 통이에게 역시 바람은 두려운 존재로 다가올 때도 있는데 그것은 바로 폭풍우 칠 때의 천둥번개를 동반하고 올 때의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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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집에 아무도 없이 혼자 있을 때 맞이하게 되는 폭풍우 치는 밤의 강풍이란 그야말로 호환마마보다도 무서운 존재와도 다름없었다. 특히 그 강한 바람에 움직이는 나뭇가지의 그림자가 내 작은 방 벽 한쪽의 괴기스럽기 그지없는 모양이라도 만들어내던 날에는 그날 밤에는 꼭 악몽에 시달려야만 했던 것이 내 어린 시절의 폭풍우 치는 날 밤의 풍경이었다. 하지만 이 책 속에서는 내 어린 시절을 무시무시하게 만들었던 이런 무서운 바람조차도 가련하고 애처로운 친구도 만들어버린다.

폭풍우 치는 밤. 통이의 엄마는 강풍을 무섭다고 하는 아이에게 '바람이 들어오고 싶어서 문을 두드리는 것'이라며 놀란 아이의 마음을 따스하게 달래주고 위로해준다. 아... 누군가 그 시절 나에게도 그렇게 강풍은 결코 무서운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었더라면... 나는 그 무수한 밤들을 이불을 뒤집어쓰고 억지도 잠들지 않으려 애쓰지 않아도 되었을까.

조금 더 일찍 이 책을 알았더라면 조금은 더 많은 날 밤에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랑하는 연인의 흩날리는 머리칼을 볼 수 있게 하는, 귀여운 꼬마가 정성껏 접어서 던져 올린 종이비행기가 마음껏 날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게 하는, 그리고 열심히 일하고 퇴근하는 우리의 눅눅한 몸을 식혀주게 하는 오후의 바람을 변함없이 사랑할 것이고, 찬양할 것이다.

이제 곧 태풍이 올라온다는데...

이번에도 나의 바람이 우리의 바람 그 모습 그대로만 조용히 머물다 흘러가 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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