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하게 살고 싶었는데 마흔에야 알았다. 평범이 왜 힘든지.
영포티(Young forty);
나이에 비해 젊게 사는 40대
현재는 반어법으로 주로 쓰여
본인 스스로만 젊은 줄 착각하는
중년을 의미하는 신조어
영포티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과한 자신감
2) 무리해서 젊은 척
3) 메타인지 부족
나는 마흔이다. 마흔은 내 삶의 어디쯤일까?
어쩌면 중반부, 아니면 후반부 혹은 결말 직전?
동시에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지금 인생의 어디쯤 지나고 있을까 가늠해 본다.
마흔을 바라보거나 직면하거나
지나가거나 추억하거나.
어떤 시기이든 마흔의 느낌은 특별하다.
최근 유독 버거운 시간을 보냈다.
완벽한 엄마이자 나로서의
마흔은 불가능함에도
그 불가능을 좇아가니 하루가 고통스러웠다.
이 고통스러운 마흔을 표현할 적당한 단어가 없을까?
그렇게 수 일을
이 상태에 맞는 형용사를 찾아 헤맸다.
온갖 부정적인 단어를 찬찬히 떠올려 씹어 본다.
괴롭다? 지겹다? 버겁다?
도저히 딱 떨어지지 않아 제대로 씹히지 않는다.
그러다 떠오른 단어,
미친.
‘미치다’라는 동사는
어간 ‘미치-’에 ‘-ㄴ-’을 붙이는 순간
즉시 현재의 상태를 나타내는 형용사로 변신한다.
‘미친’
씹힌다. 이거다.
내게 지금의 시기는 ‘미친 마흔’이다.
나의 상태를 제대로 씹을 수 있게 되자
해야 할 것이 분명해졌다.
혼란하다 혼란해져 뒤죽박죽 어지럽고 정신이 없는
마흔의 생각을 꺼내어 글에 가두기로 했다.
마흔은 사실, 조롱에 익숙하다.
영포티가 누군가에게는
비판적 톤이 담긴 풍자로 느껴지겠지만,
나에게 영포티는 공감과 연민이 담겨있는 해학이다.
해학.
국문학에서는 웃음으로 눈물 닦기라고 표현한다.
이보다 더 적확한 표현이 있을까?
눈물을 웃음으로 닦을 수 있는 나이, 마흔.
이제 조롱당해도
여유롭게 스스로를 조롱하며 웃을 수 있다.
마흔, 대단한 꿈이 있는 것도 아니다.
꿈을 생각할 여유도 갖기 어렵다.
나만 해도 그렇다.
세 아이를 키우며
그들의 의식주를 책임지던
영유아 시기를 갓 벗어날 때
내가 자고 싶을 때에 잘 수 있게 되자
이제 좀 살겠다 싶었다.
그땐 간과했다.
눈에 보이지도 않았던 꼬맹이들의 정신세계를.
그들의 정신세계는 작은 일에도
사정없이 복잡해져 스스로 자가증식했다.
가뜩이나 정신이 없는 세계가
이 작은 집에 옹기종기 모이니
내 세계는 돌볼 틈이 없었다.
그뿐인가?
그 복잡한 호르몬의 세계는 빈틈도 많았다.
사회는 그 빈틈을 노려
어쩌면 엄마의 잘못된 양육 태도가
원인일 가능성이 높을 거라며
은근슬쩍 탓을 하기 바빴다.
문제는 그걸 스스로 받아들이며 자책하고 있는 나였다.
내 하루는
거창한 꿈을 생각하기보다
‘오늘도 무사히’를 느낄 틈이 생기면
그걸로 다행이었다.
이 와중에 스스로를 챙긴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젊게 살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영포티,
그들은 오히려 칭송해야 하는 존재이다.
평범하게 사는 것이 어렵다는 걸
알게 되는 나이가 되었다.
평범은 저절로 오는 상태가 아니다.
매일의 나의 선택과 노력이 가져온 가치이다.
평범을 넘은 세계까지 넘본다?
게다가 젊어지려는 노력까지 할 수 있다고?
아직은 불가능한 꿈에 가깝다.
영포티, 이젠 다르게 바라볼 때가 되었다.
여유가 영포티를 만드니까.
“사람을 판단하기 전에 그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라.”
You always own the option of having no opinion
Things you are told about others may be true, but it’s better to suspend judgment.
출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Meditations) IV.3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의 오늘에 잠시 빛을 내어주는 작은 별이 되어
작은 공감과 위로를 주고 싶습니다.
- 별밤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