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어른의 꿈, 아이의 꿈, 모두의 꿈

꿈꾸기 너무 좋은 제주에서 꿈꾸는 사람들과 함께한 시간들

by 제주 아빠
700여 년 전 보카치오도 나와 비슷한 상황을 겪었던 걸까? 본의 아니게 나의 제주 생활 그리고 육아 휴직은 데카메론의 21세기 재연극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전대미문의 펜데믹은 누군가에게는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기는 슬픔이 분명하지만 살아남은 자는 살아내야만 하는 현실이기도 했다. 누가 누구를 부러워하고 누가 누구를 원망할만한 상황이 아니라 그저 나에게 주어진 상황을 감사히 받아들이며...


"하담 아빠가 있는 동안에 내가 이걸 꼭 할 거야." 코지 사장님은 뽀얀 곰국 마냥 진하게 하얗고 향긋한 달콤함에 발효주 특유의 톡 쏘는 향이 일품인 제주 유산균 막걸리를 들이켜는 날이면 어김없이 이 말을 되뇌곤 하셨다. "말로만 하지 말고 하세요. 저 이제 곧 복직해요." 주거니 받거니 티키타카가 잘 맞는 사장님과 어느덧 이래저래 때론 부모, 자식처럼 때론 벗처럼 시간을 보냈지만 동상이몽이었던 듯하다. 그렇다고 해서 사장님의 생각을 무시한 것은 결코 아니다. 내심 응원했고 이루길 바랐다. 더군다나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있다면 팔 걷고 나서서 도우리라 생각한 것도 분명하다. 시간만 그저 속절없이 흘러갈 뿐이었다.


KakaoTalk_20201121_144202848.jpg 이제는 완전히 파랗게 올라온 잔디에 매일같이 몸을 비비며 애교를 부리는 나그네도 손님이 많아진 이곳 코지에서의 삶이 좋은가보다. 그중에서도 유독 나를 좋아한다고 느끼면 욕심일까.


6월의 어느 날은 꿈꿔왔던 사장님의 생각이 실현되기 좋은 날이었다. 먼저 손님들이 죽이 잘 맞았다. A선배는 군생활을 함께 했다. 교회를 다니는지라 가족 모두도 친했다. 첫째가 태어난 시점도 비슷하다. 둘째는 나이도 같다. 지금은 전역 후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오래간만에 연락이 와서 제주도에 놀러 와 우리 집에 들렀고 짧은 시간 제주의 매력에 푹 빠져 그다음 달 바로 한달살이를 시작했다. B형님은 첫인상부터가 푸근하고 좋았다. 하나 있는 아들도 우리 아이들과 곧잘 어울렸다. 이래저래 사장님과 함께 밤마다 모여 막걸리병으로 차곡차곡 탑을 쌓았다. C는 배우였다. 연예인. 사실 TV를 안 봐 잘은 모르지만 유명한 배우라고 했다. 하지만 그냥 동네 동생 같았다. 배우라고 하면 선입견이 뭐랄까 일반인과는 잘 안 어울릴 거 같은데 우리와 똑같이 육아에 시달리는 아빠고, 누군가의 남편이면서(육아 때문에 잔소리 듣기도 하는) 누군가의 아들인 모습이 영락없는 우리였다.


이런 사람들이 함께 지내다 보니 사장님도 아마 결심하기 조금 나았으리라. 그렇게 열 명의 흑사병 도피자들의 현대판 이야기가 시작됐다. 이웃주민들이 함께 모여 시작한 이 이야기는 무더위가 다가오는 제주의 6월 여름밤을 내내 달궜다. 예산 담당은 사장님이고 고기 굽기와 불꽃놀이는 내 몫이었으며 손님들은 마음껏 즐기는 시간이었다.(아차 여기서 손님이라고 버릇처럼 다른 사람들을 호칭하는데 나도 사실 손님인데 어느 순간 난 비정규 직원처럼 되어버렸고 나조차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처음 오는 손님들은 하나같이 내가 다 직원인 줄 알았다고 한다.) 물론 성숙한 시민의식을 가진 손님들은 매일 이렇게 모이는 시간에 사장님의 예산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솜씨를 뽐내어 안주며, 술이며, 이야깃거리를 제공했고 무밭으로 둘러싸인 적막한 피렌체 교외와 비슷한 신천리 외곽에서 펜데믹을 잠시나마 잊기 위해 몸부림쳤다.


6dFkGe2_6gskhr_75XGQy.jpg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모이면 음식도, 이야기도, (술도) 끊이지 않게 된다. 무엇보다 트인 공간에서 마음껏 수다 떨며 아이들 역시 부모의 시간에 억지로 가만있을 필요가 없다.


사장님의 꿈은 음식 나눔을 통해 사람들에게 자발적 기부금을 걷어 그것으로 어려운 환경에 처한 아이들을 돕는 것이었다. 물론 돈의 흐름만 따지면 이것만큼 손해 보는 게 없을 것이다. 매달 15일 30일 두 번 이 행사를 하기로 했는데 이때 나가는 비용이 상당한데 자발적 기부금은 그에 10분의 1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장님은 돈으로 돕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남을 돕는 즐거움을 그런 마음을 뿌리내리게 하고자 하는 더 큰 뜻이 있었다. 물고기를 잡아줄게 아니라 잡는 법을 가르쳐준다랄까. 그런 면에서 동의가 됐기에 팔 걷어붙이고 무더운 더위 불구덩이 앞에서 고기를 굽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게다가 사장님은 손님을 모시는 호객행위(?)를 주로 하셨기 때문에 허드렛일은 나와 중국인 근로자 '아이(중국어로 이모라고 한다.)'의 몫이었다. 불만은 없었다 원래 물주는 그런 거다.


그렇게 6월 15일 처음 시작한 이 행사는 성황리에 마무리됐고 한 달에 두 번만 하기가 아쉬워 그 이후로는 매일같이 포틀럭 파티를 열었다. 마을 사람들까지 초청되어 함께한 이 시간이 지금까지 제주도에서 머문 약 8개월의 시간 중 가장 떠들썩한 시간들이었다. 흥청망청 술에 취해 시간을 허비하는 그런 시간이 아니라 이 시간을 함께 공감하며 인간사에 대해 희로애락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너무나도 소중한 시간이었다. 한달살이를 하는 분들은 고정적인 게스트로 매번 함께 했으며, 잠깐 머무르다 가시는 분들도 이곳에서 함께 시간을 나눴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했는데 B형님은 이곳 제주에서 예전 직장에서 일하던 알바생을 만나기도 했다. 물론 그날 밤 우리의 이야기는 제주도의 기라성 이상이었다. 모두가 하하 호호 떠드는 시간 동안 여름밤은 시원한 바람과 함께 우리 이야기를 듣기 위해 주변에 머물렀다.


20200615_183323.jpg 해가 길어 느지막이 여유롭게 준비해도 밤까지 꽤나 긴 시간을 밝은 가운데 잔치가 벌어진다. 어느덧 어둑하게 밤이 내려앉으면 이야기는 깊어지고 사람에 대한 애정도 더 깊어진다.


나에게도 의미 있고 감사한 손님들이 찾아왔다. 육군사관학교에서 훈육장교를 했는데 그때 나의 제자들이면서 앞으로 함께 군생활을 하게 될 동행자이고 또 친구인 생도들이 제주도에 찾아온 것이다. 마침 그날도 어김없이 마을 파티가 있던 때라 반가운 마음으로 정말 신나게 어울렸다. 반가움에 반가움을 더해 쌓여가는 막걸리 통보다 이야깃거리가 더 높이 쌓였으리라. 육지에서 있으면서 술을 마시지 않았던 내가 여기서 이렇게 술을 마실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술이 중요한 게 아니란 걸 깨달은 것도 이즈음이었다. 교회를 같이 다니던 승리네 역시 우리의 게스트이자 호스트이기도 했다. 그렇게 모여든 아이들이 몇이나 됐는지 다 세지도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마당 가득히 채운 까르르 웃어젖히는 그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와 하하하 허공에 멀리 퍼지는 어른들의 웃음소리는 인간의 존재에 대해서 다시금 깨닫게 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즐거움이 있으면 때론 상처도 있는 법이다. 즐거운 시간을 매일 보내던 어느 날 용기백배 작은 아이는 같이 유치원 다니는 여자 아이가 마을 파티에 함께 하자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자기 딴엔 멋있어 보이고 싶었는지 닭장에 가보자는 말에 이끌려 자랑스레 닭장을 들어갔다. 투계 잡종인 수탉을 비롯해 꽤나 큰 닭들이 여럿 있는 그 닭장에 말이다. 날카로운 아이의 비명소리와 울음소리가 웃음 가득했던 코지 타운의 밤하늘을 잠시 동안 음소거 상태로 만들었다. 처음엔 몰랐지만 멀리 있는 닭장에서 아직 나오지도 못한 채 겁에 질려 울고 있는 아이는 우리 아이라는 것을 알았고 마침 근처에 있던 다른 형님이 아이를 구조하러 닭장으로 들어갔다. 후일담에 그 형님 조차 생명의 위기를 느꼈다고 한다. 아이는 울면서 피를 철철 흘리고 있어 마침 흰옷을 입은 아이의 어깨를 벌겋게 물들였고 닭들은 여전히 꼬꼬 소리를 내며 주위를 맴돌았다.


KakaoTalk_20201121_152112339.jpg 두 바늘을 꿰매는 동안 난리도 아니었다. 의사 선생님 포기. 겁 많고 엄살 많은 이 아이가 여자 친구랑 닭장 갈 용기는 어디서 났을까.


눈썹 윗부분에서 피가 멈추지 않고 흘렀다. 응급실도 없고 응급처치를 할 상황도 없는 상황이었다. 아이는 고통보다는 놀라서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더해서 너무 많은 어른들이 동시에 달려와 아이를 둘러싸다 보니 오히려 겁에 질린 듯했다. 아빠인 내가 나서서 모두에게 양해를 구하고 아이를 분리시켰다. 아이의 상처도 상처지만 트라우마가 남지 않도록 하는 게 우선이었기에 엄마랑 단둘이 조용한 곳에 가서 대화를 나눠 아이를 진정시키도록 했다. 눈을 쪼인 것이 아니기에 얼마나 천만다행인가. 상처는 남겠지만 장애는 남지 않을 것이다. 아이는 엄마랑 2층에서 시간을 보낸 후 진정이 됐다. 승리네 집사님이 근처 약국에 동행해서 어렵사리 밴드를 구해왔다. 벌어진 상처부위를 붙여서 고정시키는 밴드로 일단 응급처치를 하면 된다고 급하게 전화한 응급실에서 답해주었다.


싸늘하게 정적이 흐를뻔했던 위험천만한 순간이었다. 먼저 구조해준 형님께도 감사드리고 다른 분들께도 괜찮으니 다른 아이들 닭장 들어가지 않게 조심시키시라고 말했다. 닭장에서 구조된 아이를 본 순간 이미 괜찮겠구나 안도했기 때문에 병원보다는 아이의 마음이 우선일 수 있었겠다. 예전에 만남의 광장 휴게소에서 작은 강아지에게 공격당했던 큰 아이의 사건이 떠올랐다. 그때도 그랬다. 아이의 마음이 먼저. 흉터는 남겠지만 마음의 상처는 남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물론 끝내 견주로부터는 사과를 받지 못했다. 끝까지 자기 아이는 물지 않는다고 했다. 내가 책임을 묻기도 전에 그렇게 변명으로 일관했다. 단 한 번도 아이의 건강이나 마음의 상처를 물어봐주지 않았다. 아이가 진정되도록 기도해달라고 문자를 한 번 보내고는 말았다.


20200615_200849.jpg 밤엔 별도 빛나고, 아이들의 손에 쥐어진 불꽃놀이도 빛나고, 여기 모인 사람들의 웃음에 하얀 치아도 빛나고, 우리 모두의 꿈도 빛난다. 찬란한 6월 여름밤의 기억이 아로새겨진다.


잠시 후 역시나 작은 아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또 나와서 신나게 논다. 회복탄력성이 훌륭한 것일까. 마음이 항상 가장 중요하다.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일체유심조. 같은 상황에서도 어떤 사람은 흉 질걸 걱정해서 거기에 집중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놀란 아이의 마음에 집중하는 사람도 있다.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결론 내릴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다만 우리 가족의 양육법은 그렇다. 마음. 항상 마음을 먼저 돌보기 위해서 노력한다. 그렇게 하다 보니 아이가 이렇게 다시금 잘 놀게 되는 것이리라.


한 여름 제주도의 밤은 다소 습도가 높지만 바닷바람이 불어 너무 덥게만 느껴지진 않는다. 무엇보다 좁은 공간에 밀집되어야지만 사람들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도시와 다르게 너른 공간에서 모두가 마음껏 함께할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일 듯하다. 서울의 세배 면적에 고작 67만 명이 살고 있다니. 신천리에는 고작 600여 명만 살고 있다. 이 넓은 땅에. 사람 보기가 힘들 정도인 이곳에 그나마 타운하우스를 이루고 있는 코지 타운이라 꽤나 사람이 모인 것이다. 7동에 사람이 머물거나 떠나길 반복하니 기껏해야 30명도 채 안 되는 사람들. 그중에 절반 이상이 아이들인 이곳에서의 시간은 밤새 고기 굽는 냄새보다 인간의 향기가 더욱 그윽한 시간으로 기억된다.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이곳에서의 여름이 한껏 기대되는 이유다. 그래 사람이 답이다.


KakaoTalk_20201121_151717801.jpg 나무도 푸르고, 잔디도 푸르고, 우리의 꿈도 푸르다, 비가 오는 날 유치원을 가기 위해 머리에 가방을 이고 있는 아이를 보며 사람 냄새 가득한 이곳의 생활이 더욱 그리워진다.


Tip. 전원에서의 삶이 무엇보다 특별할 수 있는 것은 우리만의 분리된 공간을 가진다는데 있을 것이다. 아파트에서 층간소음 때문에 스트레스받아 밖으로 나온다고 해도 단지 내 사람들이 많다면 아파트 숲에 둘러싸인 작은 공간에 또 북적북적 사람들이 몰리기 마련이다. 전원의 삶을 꿈꾸는 사람들은 아마도 이런 부분에서 염증을 느꼈으리라.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인간은 결국 인간과 어울리며 살 수밖에 없는 존재다. 문제는 어떻게 관계하느냐라고 생각된다. 내 공간을 갖고 충분히 그 안에서 안락함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 함께 어울리는 것과 그렇지 못한 상태에서 어울리는 것은 다소 차이가 있다고 느꼈다. 코로나 19로 인해 이렇게 예민한 상황에서도 사람들이 어울릴 수 있었던 것은 이미 몇 주를 이곳에서 함께 지나며 아침에 만나면 인사 나누고 아이들이 함께 어울리며 부모들도 함께하게 되는 시간을 가지며 안전하다고 믿고 친해진 시간과 더불어 제주라고 하는 곳에 여유롭게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마음이 일단 여유로운 부분. 무엇보다 각자 가족만의 공간이 확보된 상태에서 가질 수 있는 넉넉함 때문일 것이다. 가족들과만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도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도 모든 것이 가능한 게 바로 전원에서의 삶이 가진 진정한 의미일 것이다. 그렇게 아이들은 마음껏 뛰어놀며 꿈을 키워간다. 넓은 연못에서 더 크게 몸을 키운다는 잉어처럼.


keyword
이전 21화#21 제주 여름,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