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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드id Feb 22. 2019

스스로 들어가는 감정의 감옥

‘너그러운 이해가 더 필요한 세상’


한가한 어느 주말, 지하철 안 노약자석 근처에 서서 책장을 넘기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주변 사람들의 뾰족한 시선이 평온한 분위기를 뚫고 제 쪽으로 날들었습니다. 사태 파악을 위해 이어폰을 빼니 신나는 뽕짝이 울려 퍼지고 있었어요. 노약자석에 앉은 할머니 휴대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었죠. 멀리서 고개를 반쯤 돌린 사람들의 일그러진 표정은 노인의 뻔뻔함을 경멸하는 감정을 흠뻑 머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진실은 달랐습니다. 할머니는 누군가가 카톡으로 보내준 영상(좋은 글귀가 담긴 흔한 영상)을 클릭했고, 배경음악이 순식간에 조용한 열차 안을 점령하게 된 거였어요. 소음을 멈추게 하려고 허둥지둥 이것저것 열심히 누르셨지만, 작동 방법을 잘 모르는 거 같았습니다. 마침 옆에 서있던 제가 미소로 양해를 구하고 번개 같은 속도로 정지 버튼을 눌렀어요.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한 듯 근처에 앉아 계시던 할머니들이 고맙다는 말을 연신 건넸습니다. 일요일 오후의 지하철은 적막할 만큼의 고요함을 되찾았고, 사람들 고개도, 표정도 제자리로 돌아갔습니다. 먼발치에서 인상을 찌푸렸던 사람들도 제 작은 행동을 통해 할머니가 뻔뻔해서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아챘을 것입니다.


<이미지 출처 : SBS 드라마 '신의' 스틸 컷>


  지하철 하면 엉덩이부터 밀어 넣거나 가방부터 던지는 아줌마, 주변 사람 아랑곳하지 않고 큰 소리로 통화하는 할아버지, 동방예의지국을 운운하며 자리 양보를 강요하는 노인이 먼저 떠오릅니다. 책 보는 척 하면서 자리 양보 안 한다고 할아버지한테 머리를 얻어맞은 경험도 있습니다. 자리도 아닌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아줌마의 불쾌한 행동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적 있고, 열차가 떠나가라 통화하는 어르신을 피해 인상 쓰며 다른 칸으로 피신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지하철 속 무식한 사람들'이라는 고정관념을 키워왔어요.



  그러던 중 뽕짝에 당황한 할머니를 보고 문득 깨달았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내가, 누나가, 친구들이 아줌마가 되었고, 늘 청춘일 것만 같았던 어머니가 할머니가 되었다는 걸. 귀가 잘 안 들리던 외할머니가 일부러 큰 소리로 말하는 게 아니란 것도 새삼스레 떠올랐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남에게 불쾌한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처음 보는 누군가를 너무 쉽게 탓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누군가의 가족을 향한 무차별적인 무언의 폭력일 뿐만 아니라 쓸데없는 감정 소모일 테니까요.


  관절이 좋지 않아 자리를 찾아 헤매는 것인지, 청력에 문제가 생겨 목소리가 커졌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둘째를 임신하고 노약자석에 앉은 직장 동료가 할아버지의 호통에 서러워 배를 가리키며 엉엉 울었다고 했습니다. 타인의 상황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개인적인 잣대로 규정짓는 습관은 헛헛한 삶을 더욱 척박하게 만듭니다. 멀리서 봤을 때 미간을 찌푸리게 만든 할머니의 행동에 안타까움이 서려 있던 거처럼.


  누군가를 향해 당연한 듯 내리는 섣부른 판단과 행동 하나하나가 스스로를 좁은 감정의 감옥에 가두는 시작 아닐까요. 냉정한 사람이 많은 토박한 세상이라고 애써 예민할 필요 없습니다. 일부러 타인을 경계하면서 밀어낼 이유도 없습니다. 모두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사는 누군가의 가족이고, 이웃이고, 사랑일 테니까요. 짜증 섞인 감정 소모보다는 너그러운 이해가 더 필요한 세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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