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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드id Oct 23. 2019

지겹다, 판에 박힌 말의 향연

'닳고 닳아 진심을 담기에는 너무 얇은 말'


어느 순간부터 '동안'童顔이라는 말이 듣기 거북해졌다.


서열을 따지기 위해 나이를 묻는 질문, 그리고 그 뒤에 따라붙는 동안이라는 말이 거슬렸다. 한때는 그 말이 좋았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같잖게 20대 때도 30대 초반에도 이 말을 듣고 좋아했다는 거다. 가부를 떠나 당연히 싱그러움이 넘치는 때다. '동안'은 '나이 든 사람이 지니고 있는 어린아이 같은 얼굴'을 일컫는다. 천진한 표정을 짓는 모습을 '동안'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철없어 보인다는 또 다른 표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사람들은 나에게 동안이라고 한다. 자랑는 게 아니다. 사람들이 그냥 습관적으로, 형식적으로, 특별히 할 말이 없어서 하는 말일뿐이다. 진심 아니라는 걸 안다. 뭐라고 대꾸를 해야 하나 고민도 많이 했는데, 요즘에는 "네, 키가 어려 보이죠?"라고 답하고 만다. 불혹을 훌쩍 넘겨 젊어 보이기보다는 멋지나이 들고 싶다. 어떤 사람은 놀란 토끼 눈으로 "xx살 정도인 줄 알았어요"라고 했다. 고작 한 살 어려 보인다는 말을 뭘 그리 거창하게 읊는지 민망했다. 키 얘기를 꺼내기도 애매모호. 안 듣느니만 못한 형식 치레.


특히 나이를 말하기 싫은 이유와 동안이라는 말이 듣기 싫은 이유는 일단 그때부터 사람들이 얼굴을 자세히 관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이에 부합하는 무언가를 찾아내고야 만다. '자세히 보니까 눈가에 주름이 많더라', '목주름은 못 속인다더니...'라는 하나도 안 궁금한 뒷말을 누군가에게 건너 건너 전해 듣기도 했다.


왜 앞에서는 기분 좋은 말의 향연을 펼치고 솔직한 마음은 뒤에서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는 걸까. 가끔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앞에서 환한 미소를 보이고 뒤에서 옅은 비웃음을 띠는 모습을 상상하면 소름이 끼다. 그래서 그런지 어떨 때는 별 말없이 시크하게 앉아서 냉소를 풍기는 사람에게 더 정이 갈 때가 있다. 적어도 그 사람은 솔직한 자신의 감정을 내밀고 있는 중이니까.


"젊어 보여요!", "잘 생겼어요", "미인이세요", "다음에 또 만나요", "힘내요", "다 잘 될 거야", "꼭 보답할 게", "언제 밥 한번 먹어요"


<이미지 출처 : pixabay>


기분 좋으라고 툭툭 내던지는 판에 박힌 말의 향연이다. 나도 안 해본 건 아니지만 그리고 아예 안 할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줄여야겠다는 의지가 강다. 너무 흔해서, 너무 많은 사람 입에 오르내리느라 닳고 닳아 진심을 담기에는 너무 얇은 말이 되어 버렸다.


외모를 두고 '보통이세요', '조금 괜찮게 생긴 거 같네요'라고 차마 말할 수 없으니 반올림하는 격으로 거창한 말을 뿜어내는 것일 뿐 아무 의미 없는 말이다. 동안이라는 말도 상대가 순간 발산한 천진한 표정을 보고 거창한 표현으로 반올림 한 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할 말이 없으면 차라리 하지 말고, 그래도 상대에게 뭔가 말하고 싶면 팩트를 찾아 전달했으면 좋겠다. 넥타이가 멋있는지, 목소리가 매력적인지, 남다른 능력이 있는지를 찾아낸다면 말이다. 그리고 진심으로 상대를 만나고 싶으면 정확한 날짜를 콕찝어 정하면 된다. 아무리 봐도 마땅한 게 없으면 그저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적당한 맞장구면 충분하다. 머리를 열심히 굴려 갓 지어낸 말은 무익하다.  


성실히 조사받겠습니다.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켜 죄송합니다.


각양각색의 유명인들이 뉴스에만 나오면 로봇처럼 반복하는 말이다. 이제는 닳고 닳을 만큼 입에 오르내려 아무도 믿지 않는 판에 박힌 말이 됐다.


브런치에서 활동하고 있는 @choizak 작가는 "온갖 빈말들의 향연 속에서 가끔 진심으로 전하는 말조차 덩달아 빈말로 비칠까 말을 삼키게 되는 때가 많다"라며 "범람하는 말 안에서 호들갑 떨지 않고 진심을 전하는 법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라는 말을 전했다. choizak 작가의 말처럼 어쩌면 난무하는 빈말들 속에서 진심 어린 말들이 차지할 자리가 점점 줄어들고 있을지도 모른다.


감정을 배제한 채 자동판매기 물건처럼 툭 튀어나오는 말, 그리고 이어지는 어색한 리액션은 가끔씩 상대를 심리적으로 피곤하게 한다. 더군다나 이러한 말을 전한 후에 순식간에 웃음기가 가시는 걸 상대는 기가 막히게 포착할 것이다. 그 말이 갓 지어낸 가식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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