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화가 많은데, 자식 낳고 사람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아들이 작년에 중학생이 되었습니다. 손 안 가게 뭐든 척척해내는 딸아이와 비교돼 아들을 늘 걱정했습니다.
아들이 미덥잖아서 잔소리도 많이 했죠. 사고라도 칠까 학교생활에 대한 당부는 기본, '외출할 때는 방 불을 끄자', '빨래는 바닥에 던지지 말고 바구니에 넣자', '밥그릇은 싱크대에 담가두자', '시간 약속을 잘 지키자', '밤에 게임할 때는 소리 지르지 말자' 등등 가족과의 약속도 혼자만 안 지켜 잔소리를 하게 만들었죠.
위에 언급한 내용들은 딸아이에게는 불필요한 잔소리였습니다. 딸은 한두 번 말하면 새겨듣고 실천하니 잔소리한다고 생각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아들에게 비슷한 말을 반복하면서 '아, 이게 바로 지긋지긋한 잔소리구나'라는 걸 저조차도 깨달았답니다.
그럼에도 아들은 늘 한 귀로 듣고 눈, 코, 입, 귀로 흘려보내는 것만 같았습니다. 늘 좋게 타일렀지만, 속마음은 못 마땅했죠. (아들에게 들키지 말아야 할 아빠의 속마음) 중학생이 되니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도 늘어 귀가가 늦어 주의도 여러 번 주었습니다. 그래도 항상 약속한 시간보다 조금씩 늦게 도착. 이 정도는 애교로 패스.
중학교 1학년 어느 주말, 아들이 친구 집에서 자고 다음날 바로 농구 수업에 간다고 했습니다. 지난번 친구 집에서 밤새도록 놀고 농구학원에 빠진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꼭 가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말도 없이 학원에 안 갔더라고요. 전화를 걸어 물었더니 엄마한테 아침에 허락을 받았다고 하네요. 전날에는 학원에 가겠다며 저와 약속하고, 다음날 더 놀고 싶으니 엄마한테 얘기하고 스리슬쩍 학원을 빠진 거죠.
학원에 안 간 것보다 약속을 안 지킨 데 대한 실망이 컸습니다. 아들에게 같은 약속을 두 번이나 안 지켜 실망했다고 얼른 집에 들어오라는 문자를 보냈습니다.
"엄마한테 허락받았는데, 제가 왜 아빠한테 혼나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아들에게 문자가 왔습니다. 분노 게이지 급상승. 바로 전화를 했습니다. 참아야 했지만, '노느라 학원 빠지고 약속도 안 지키는 게 잘한 일이냐? 가족끼리 하자는 거 지키는 게 뭐가 있어?'라고 화를 쏟았습니다.
"당장 집에 들어와."
"싫어요. 안 들어갈 거예요."
'소문으로만 듣던 사춘기 반항의 시작이구나.!' 말문이 턱 막혔습니다. '정말 안 들어오면 어쩌지' 슬며시 걱정도. 기억은 잘 안 나지만 핸드폰 압수한다, 누나는 잘했는데 어쩌고 저쩌고 하며 화를 내고 끊었습니다.
얼마 후 아내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아들이 울면서 전화를 했다고. 무서워서 이대로 집에 못 들어가겠다고 엄마 교회 끝나면 같이 가자고 했다더군요. 아내에게 한바탕 아들에 대한 불만을 쏟아냈습니다.
아내는 그동안 아들이 저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많이 노력했다고 말했습니다. 방 불을 안 끄고 나갔을 땐 누나나 아내에게 전화해 꺼달라고, 아무렇게나 방치한 빨래도 빨래통에 넣어달라고 했다네요. 게임하기 전에는 자기 방문과 제 방문을 슬며시 닫았던 일도 떠올랐습니다.
좋게만 말하니 제 말을 그저 한 귀로 먹어버리는 줄만 알았습니다. 나름 노력하고 있다는 걸 새벽같이 나가 저녁에나 들어오는 아빠는 미처 몰랐습니다. 제가 화를 내니 아들도 순간 반항하지 않았을까. 미안한 마음이 스멀스멀 피어올랐습니다.
아들과 바로 마주치면 좋은 소리가 안 나올 거 같아 밖으로 나왔습니다. 한참을 걸으며 마음을 가라앉혔습니다. 아들에게 할 말도 정리해 두었고요. 집에 들어갔더니 아들은 여자친구 만나러 나갔다고 함. 이런 반전!
저녁 무렵 아들이 들어왔습니다. 보통 제 방에 먼저 들러 '아빠 안녕'하는데, 자기 방으로 쏙 들어가더라고요. 저는 이미 화가 방전된 상태라 아들을 불렀습니다.
아들에게 정리한 내용을 브리핑했습니다. 그동안 아빠와 약속 지키려고 노력한 걸 몰라서 미안하고, 화부터 내서 또 미안하다고. 핵심은 약속 안 지킨 건 잘못한 일이라고. 앞으로 엄마, 아빠와의 약속 잘 지키자고. (물론 솔선수범! 전 아이들과의 약속을 진짜 잘 지키거든요 ㅋ)
아들에게 할 말이 있냐고 물었더니, 이때다 싶었는지 아빠는 누나한테만 싫은 소리 안 하고, 자기한테는 맨날 뭐라 그런다는 서운함을 내비쳤습니다. (여기서 또 누나와 비교한 제 자신을 반성하며. 그게 아니다. 누나도 잘못하면 따로 얘기한다고 변명하고) 아들은 제 말을 차분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잘 알겠다고, 촉촉한 눈망울로 화답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한뼘 더 가까워졌습니다.
아동전문상담사들이 공통적으로 부모에게 전하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가 사춘기 아이들 행동을 못 참고 폭발하는 일을 반복하면 아이들은 마음의 문을 닫고 관계 회복은 점점 어려워진다고. 동등한 관계인 친구끼리는 싸우고 아무렇지 않게 화해할 수 있지만, 정신적, 정서적으로 미숙한 아이들에게는 부모의 이해가 우선이라고.
이후로 아들에게 화를 낼 일도 화를 낸 적도 없습니다. 나이 든 덕에 화가 좀 줄어든 듯합니다. 감정적으로 말하지 않으니 아들도 대부분 좋은 태도로 화답합니다. 제가 조금만 참으면 얼굴 붉힐 일은 없습니다.
아들이 모든 걸 만족스럽게 해서가 아닙니다. 절대, 네버 아닙니다. 아니라고요! 아빠의 뾰족한 잔소리는 마음속에 차고 넘칩니다. 다만 가는 말이 고와야 상대가 받아들이고 실천할 확률이 높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배웠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아빠가 할 게. 아빠가 백 번 정도 하다 보면 OO이가 하는 날도 오겠지. "
"네!"
아들이 깜빡하면 그냥 제가 합니다. 어떤 방식이든 알려주면 됩니다. 아들도 웃으며 답합니다. 그리고 다음번에는 실천합니다. 그 다음번에는 또 깜빡합니다. 이게 아이들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합니다. 어른도 하루아침에 잘못된 습관을 고칠 수 없는데, 아이들만 달달 볶은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희망과 기대는 있습니다.
20년, 30년 뒤에 부모 말이 떠올라 갑자기 실천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그랬거든요. 어릴 때는 부모님 말씀을 그저 잔소리로 여길 때가 많았습니다. 한 귀로 흘려보내고 잔소리 듣고, 또 흘리고 혼나고 짜증 내는 악순환. 돌아보면 '부모님 말씀 중에 틀린 게 있었나?' 싶습니다. '나처럼 뒤늦게라도 깨닫겠지'라는 마음으로 아이들을 대하면 화낼 일이 줄어듭니다.
최근 아들이 요즘에 아빠가 화내는 걸 본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제가 화가 많은데, 자식 낳고 사람이 되어가나 봅니다) 더불어 "엄마도 요즘 착해졌어요. 착하게 살기로 했나 봐요!"라고 말하네요. "맞아요!" 딸도 옆에서 거드는 모습이 가관입니다.
오냐오냐 해줬더니, 아주 부모 평가를 하고 있네요. 좋다는 표현이겠죠. 듣기 싫은 말은 아니어서 웃어넘겼습니다. 아내와 함께 아이들에게 말을 예쁘게 하자고 다짐했거든요. 내가 듣기 싫은 말(말투)은 누구라도 듣기 싫을테니까요. 특히 부모와 주파수가 안 맞는 사춘기 아이들은 더더욱.
오늘도 참는 법을 배우며 아빠는 한 뼘 자라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