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답의 시대는 끝! 여러 갈래로 열려 있는 청소년의 미래를 직면하다
자식을 키우다 보면 성적이 오르거나, 상을 받거나, 학급 임원이 되면 기분이 참 좋습니다. 마치 아이의 성취가 곧 제 인생의 성적표라도 되는 듯 말입니다. '아이들이 저보다는 더 나은 삶을 살아야 한다'라는 보이지 않는 압박을 스스로에게 걸어두고 살았습니다. 일단은 공부만이 답이라고 믿었고, 좋은 학교, 좋은 직장만이 인생의 안전 장치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저는 이와 비슷한 길을 걸어왔으면서 단 한 번도 '성공했다, 행복했다'라고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20여 년 직장인으로의 삶은 무난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직장 생활은 안정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위태로움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마땅히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남들이 밟아 놓은 길을 택했고, 지금도 직장인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아이들이 저처럼 평범한 샐러리맨의 삶을 반복할까 두렵지만, '당장은 다른 길도 없으니, 공부라도 해야 한다'라는 사고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때까지 그것이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믿었습니다. 다른 선택지가 있었는지는 스스로에게 묻지 않은 채 말입니다.
얼마 전, 복싱 대회에 출전한 아들과 하루 종일 경기장에 머무르면서 이 오래된 기준에 균열이 생겼습니다. 아들과 같은 복싱장에 다니는 고등학교 2학년 A군을 제 차에 태우고 경기장에 갔습니다. 딸아이의 중학교 동창이기도 한 이 학생과 처음 만났음에도 복싱, 주식과 코인, 진로 등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A군은 중학교 때부터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으로 혼자 열흘간 일본 여행을 다녀온 경험도 있고, 주식으로 번 돈과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어머니와 해외여행도 갔다고 했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복싱장에 열심히 다니며 최근 프로라이선스 자격증을 땄고, 인생의 목표도 벌써 세워 두었다고 했습니다.
"제가 공부는 못해요. 대학도 안 갈 거예요. 교도관 시험 준비하고 있어서 국어, 영어, 한국사 시간에는 안 자고 수업 듣는 연습부터 열심히 하고 있어요. 복싱도 계속할 거고, 서른 살 넘어서는 복싱장을 인수해서 운영하고 싶어요."
목표는 또렷했고, 인생의 방향도 분명했습니다. 진지하고 자신감 있는 고등학교 2학년의 모습에 순간 저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공부 안 하는 아이는 문제아라는 편견, 좋은 대학을 나와야 안정적인 인생을 살 수 있다는 믿음, 자식들이 공부를 안 할까 노심초사하는 마음, 이 모든 게 제 안의 낡은 프레임이었음을 알았습니다. 다만 동시에 '저 아이는 특별한 사례일지도 모른다'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 순간조차 저는 여전히 정답의 틀 안에서 세상을 재고 있었습니다.
저와 동년배인 주변의 친구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위장 전입을 해서라도 좋은 중고등학교에 보내고, 중학교 때부터 과외를 시키는 건 기본입니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보내기 위해 자식에게 재수와 삼수를 권유하고, 일찍이 유학을 보내는 선택도 서슴지 않습니다.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부모들이 붙잡을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안전장치가 여전히 좋은 대학이기 때문입니다. 자녀의 적성과 방향보다도, 일단 명문대 입학부터 시켜야 한다는 강박이 부모 세대의 집단적 판단이 되어버린 현실이기도 합니다.
문득 큰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김 부장은 좋은 대학, 대기업, 서울 자가 아파트 소유라는 정답형 인생을 위해 쉼 없이 달려왔고, 자식에게도 그 삶을 강요했습니다. 하지만, 종착역에는 후회와 허무함만 남았습니다.
마음 한 켠이 뜨끔했습니다. 저 역시 '아이들에게 좋은 대학 나와야 사회에서 뭘 해도 인정받을 수 있어'라는 말을 자주 했거든요. 며칠 전 중학교 3학년 아들이 "방학 때 아르바이트해 보고 싶어요. 아빠 선물도 사드리고요"라고 했을 때 "아빠는 영어 1등급이 더 큰 선물이야"라고 말해버렸네요. 저 역시 김 부장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아이들에게 강요하고 있었던 거죠. 심지어 그 공식 안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안타까운 결말을 너무도 많이 봐 왔으면서 말입니다.
그날 집에 돌아와 김 부장 이야기를 다시 틀어보았습니다. 예전에는 '그래도 저 정도면 성공한 인생이지'라고 흘려보던 장면들이, 그날은 이상하게 다르게 보였습니다. 회사에 남고, 상사 눈치를 보고, 자식의 진로까지 대신 결정하려 드는 김 부장의 모습이 A군의 얼굴과 겹치면서, '나는 과연 아이들에게 무엇을 물려주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처음으로 떠올랐습니다.
"제가 외아들이라서 그런지, 저희 부모님은 제가 하고 싶다는 일은 다 지지해 주시고 믿어주세요."
처음 만난 A군의 말이 가슴에 깊이 남았습니다. 남들이 가는 길이 아닌 자기만의 삶의 방향을 스스로 정해두고 묵묵히 걸어가는 모습이 멋있었습니다. 빨리 자리 잡고 결혼도 빨리해 아이도 빨리 키우고 싶다는 선한 웃음에 담긴 단단한 인생 계획이 믿음직스러웠습니다.
더불어 경기하는 동생들을 열심히 응원하고 코칭하는 모습 속에, 복싱에 대한 열정도 십분 느낄 수 있었습니다. A군은 "가끔은 이 길이 맞는지 불안할 때도 있다"라고 말하면서도, 그래도 일단은 끝까지 가보겠다며 웃었습니다. 그 불안조차 제가 평생 가져온 막연한 조바심과는 결이 달라 보였습니다.
"삼수할래? 유학 보내줄까? 아무리 학벌 의미 없다, 없다고 해도 사회 나와보면 다르거든."
앞서 언급한 드라마에서 김 부장이 명문대에 다니는 아들에게 한 말입니다. 저와 비슷한 마인드였죠. 쿨한 척하면서도 아이들이 공부에서 벗어날까 늘 불안해하며 마치 인생의 정답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굴었습니다.
제가 서른 살이 될 때까지 전공을 세 번이나 바꾸며 인생을 갈팡질팡 살아왔기에 더더욱 조바심이 났던 거 같습니다.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보면 결국, 저만의 길을, 인생을 찾아가는 시행착오였는데 말입니다. 김 부장을 보며 비춰본 제 모습은, 변덕 많은 인생이 아니라 '정답을 찾지 못한 채 미뤄둔 인생'에 더 가까웠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좋은 대학, 대기업 취업, 인생 안정'이라는 공식을 더 이상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말은 세상의 변화로 체감되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이 변화는 김 부장이나 제가 살아온 세대와 지금 자라는 청소년들의 세대가 전혀 다른 세계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요즘은 중고등학생 때부터 아이돌 연습생이 되거나, 유튜버, 프로게이머, 웹툰 작가, 크리에이터, 스포츠 선수처럼 학교 밖에서 자신의 진로를 먼저 선택하는 경우도 낯설지 않습니다. 한편에서는 공무원, 기술직, 자영업, 1인 기업 등 전통적인 대학 진학과는 다른 경로로 사회에 진입하는 청소년도 늘고 있습니다.
다만 여전히 천편일률적인 입시 중심 구조 속에서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충분히 탐색할 시간이 부족할 뿐, 청소년의 미래는 한 방향이 아니라 여러 갈래로 열려 있는 시대입니다. 문제는 가능성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 가능성을 시험해 볼 기회가 여전히 제한적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정답의 시대는 끝나고 방향성의 시대가 왔습니다. 사업가가 되겠다더니 어느 날은 아빠처럼 회사에 다니겠다는 중3 아들, 뭘 하고 싶은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대학 레벨을 올리고 싶다는 고2 딸, 그리고 또래보다 조금 빨리 인생 윤곽을 잡아가는 18살 A군까지, 모두의 삶에 정답은 없습니다.
대신 자기 길을 밀어붙이는 열정과 실패해도 다시 일어나는 끈기, 그리고 자기 선택에 책임지는 용기가 결국 미래를 개척하는 힌트가 되어줄 것입니다. 학교에서 정답 찾는 방법만 배우던 아이들이, 인생에서는 자기만의 답을 만들어가길 바랍니다.
시행착오는 실패가 아니라 개개인의 삶을 더 밀도 있게 만드는 필연적인 과정입니다. 지금의 김 부장 같은 부모 세대가 내어주는 조언은 예측 가능한 과거의 공식일 뿐, 미래 세대가 살아갈 세계의 정답이 아닙니다.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의 답은, 이제 부모 세대가 대신 써줄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