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알게 모르게 그러나 전적으로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말이 있다는데, 그것도 웃음까지 보태 맞장구를 치며 하거나 듣는 말. 바로 “인생 지랄 총량의 법칙”
이 말이 진리라면 살짝 걱정이 앞선다. 인생 50년 살 동안 변변한 지랄 한번 못 해 본 나는 그럼 앞으로 늙어서 주책맞게 지랄을 해야 한다. 지랄을 하려면 용천지랄쯤은 해야 할 텐데, 왠지 어리고 젊을 때 하는 지랄이 더 지랄 맞아서 보기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MMPI나 에니어그램 등에서 절대로 지랄을 할 성격의 인간이 못 된다 하더라도 왠지 그 가능성에 웃음이 나온다. 여기까지 쓰면서도 ‘지랄’이라는 말을 거리낌 없이 되풀이했더니 속이 펑 뚫리는 시원함을 느끼는 것은 왜일까? 일상에서 ‘지랄’이라는 말도 ‘~랄’로 순화해서 써야만 편한 내 성격과 맞닿아 있을 것이다.
흐트러짐?
퇴근을 하니 집에 아무도 없다. 중학생 막내도 모둠별 수행평가를 한 후 바로 학원에 간다고 한다. 퇴근하자마자 또 다른 제2의 출근으로 지지고 볶느라 저녁 시간을 보내던 때가 잦아든 지 꽤 오래다. 오늘같이 여유로운 조용한 저녁 시간이 50대가 되니 종종 찾아온다. 쌀을 씻으려다 멈췄다. 라면을 끓였다. 꼬들꼬들 끓여 냄비 째 김치와 함께 쟁반에 올리고 안방으로 갔다. 침대에 올라앉아책상다리 위에 쟁반을 앉히고 리모컨을 들었다. 쇼핑호스트의 요란한 목소리와 라면 호로록 소리가 무척 잘 어울렸다. 그리고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라면 먹지 마라’
‘음식은 식탁에서 제대로 앉아 먹어라’
‘식사할 때 식탁에서 휴대폰 보지 마라’
아이들에게 늘상 하는 나의 목소리가 되돌아와 내 귀에 울렸다. 보는 아이들 없다고, 이게 뭐 대수라고 흐트러짐의 해방감을 맛보다니…….
지랄 없이 사는 사람들
흐트러짐 없이 살아왔다. 규칙대로 생활했다. 전형적인 인간의 모습에 충실했다. 원칙을 지키며 살았다. 말 잘 듣는 아이로 자라났다. 선생님과 부모님 말을 잘 들었으며, 배운 대로, 원칙대로 행동하며 살았다. 무조건 수용하는 물렁한 성격이 아닌데도 그것이 도리에 맞고 명분이 있는 일이라면 지키며 살아왔다.
오늘은 왠지 ‘일탈’이 무엇인지 모르고 그저 열심히 오늘 하루도 사는 주변의 많은 사람들과 서로 응원하고 지지하고 참 잘 살아왔다 토닥이고 싶다.
내가 지금 근무하고 있는 학교는 주변이 아파트촌이 아니다. 그냥 ‘가난’이라는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어려운 상황에 처한 아이들이 참 많다. 경제적 어려움은 물론이고, 이혼, 한 부모, 가정폭력, 다문화, 입양, 조손가정 등 15세 청소년이 감당하기엔 정말 어려운 형편인데도 굳건하게 학교생활을 잘하고 있는 아이들을 볼 때면 때론 눈물이 나올 정도로 먹먹하다. 그냥 버티며 서있는 것만 봐도 대견한데 게다가 밝은 얼굴로 학교생활까지 성실히 하다니 기특하기 그지없다.
15세 발광하기 딱 좋은 나이에, 중 2 병 최고 절정기에, 설사 일탈을 일삼는다 해도 가정 사정을 들어보면 누구도 '네 잘못이다' 할 사람 없을 정도로 기막힌 형편인데도 자기를 지키며 버티는 아이들! 투정 부리기에는 이미 철들어 버린 것일까? 지금 참으며 일상을 지켜내는 아이들에게 꼭 보람을 안기고 싶다.
애쓰며 살았다.
평생 투정 한번 제대로 부리지 못하고 사신 엄마 밑에서 자라났다. 가난한 살림이지만 그것이 엄마가 최선을 다한 삶의 결과라는 것을 알기에 운동화 새로 사 달라, 친구들처럼 유행하는 옷 사달라 말할 수 없었다. 속상하고 화가 나서 말썽 부리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고생하는 엄마의 기쁨이 되기 위해서 마음을 다 잡았었다.
중학교 때 수학여행 갈 형편이 안 돼 담임선생님께 불참 의사를 밝혔을 때도 누구를 원망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 대학 갈 형편이 아니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학교에서 주는 장학금을 일주일 넘게 찾아가지 않아 서무실(행정실)에서 연락이 왔을 때, 좋아하는 엄마를 보며 섭섭해하지 않았다. 친구들 다 모여 있는 운동장 아침 조회에서 교장 선생님이 장학금 대상자로 나의 이름을 호명하며 ‘… 비록 어려운 가정 형편이지만…….’ 이란 관형구가 두고두고 내 머리를 누르는 것 같이 화끈거려 아예 행정실을 피해 다녔었다. 담임선생님과의 여러 차례 상담에서도 절대 한부모 가정임을 밝히지 않았다. 그것이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는 나의 사춘기 몸짓이었다. 하지만 내 자존심 따위는 그 얼마 안 되는 돈도 아쉬운 형편에 가려 지켜 낼 틈이 없었고 행정실에 빨리 다녀오라는 엄마를 그냥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대학교 때 항상 등록금 때문에 엄마와 나는 발을 동동 굴러야 했다. 멋모르고 한 냉면집 아르바이트로 받은 돈 7만 원 중 엄마 내복 산다고 만원 쓰고, 나 만원 가지고 나머지 5만 원 몽땅 엄마에게 드렸다. 과외 아르바이트와 장학금으로 받은 돈 모두 허투루 쓴 적 없이 오로지 등록금에 보탰다. 멋 한번 부리지 않고, 음주로 휘청거린 적 없이 꽃다운 청춘을 보냈다.
졸업 후에도 임용이 안 되는 사립사대 출신이라고 꿈을 포기한 적 없다. 과외 아르바이트로, 학교 기간제 교사로, 학습지 교사로 꾸준히 돈을 벌며 임용을 준비했다. 그것만이 나를 위해 고생한 엄마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상을 지켜 내다
늘 열심히 달려왔고, 항상 궁리하며 해결하며 살아왔다. 오빠를 잃어버린 지독한 불행 앞에서도 엄마를, 또 내 가족을 지켜 내기 위해 흐트러질 수 없었다. 일상을 지켜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며 살았다.
결혼을 하고, 아이 셋을 낳고 직장을 다니며 참 열심히 잘 살아왔다고 나를 토닥거린다. 아이들 먹거리를 최선을 다해 챙겼고, 정성을 다해 살림을 했다.
여느 상식적인 사람들이 그렇듯 민주시민으로서 역할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신호등을 지키고, 불법주차를 하지 않고, 분리수거를 철저히 하고, 공정무역을 응원하고, 장바구니를 사용하고, 비닐이나 일회용품 사용을 자제하려고 노력했으며, 에너지 절약을 실천했다. 이웃에게 피해 주지 않기 위해 내 어린 자식들을 단속했다. 민주시민으로서 의견을 제시하고 촛불에 지지와 성원을 보냈다.
어린 딸로서, 결혼한 딸로서, 직장인으로서, 엄마로서, 아내로서, 며느리로, 시민으로서 잘 살아온 나에게 대박 칭찬 한번 해 주고 싶다. 손을 얹어 내 머리를 스스로 쓰다듬으니 많은 위로가 되며 긍정의 목소리가 내 안에서 들리는 듯하다. 기특하다고, 일탈 한번 없이 어려운 환경에서도 잘 견뎌왔다고, 그리고 바르게 잘 자라 여기까지 왔다고 후하게 특급 칭찬 한번 쏘고 싶다. 나와 같은 무수한 사람들과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뜻을 지키며 잘 살아왔다고 눈길로 인사 나누고 싶다.
앞으로도 계속!
요즘 저녁에는 가끔 맥주도 한 잔 마셔본다. 지랄(음주) 총량의 법칙에 따름인지 대학 때도 안 한 음주를 43살에 시작해 가끔 취한 목소리로 들뜨기도 하고, 헛농담을 하기도 하고, 실실 웃기도 하며 풀어지는 맛이 꽤 좋다. 정도를 걷는, 벗어나지 못하는, 원칙의 틀에 갇힌 나 같은 사람들은 가끔 미친 척 벗어나기도 해야 매력적일 것이다.
사실 받아 줄 누군가가 보였다면, 비빌 언덕이 자리했다면 미친 척하고 지랄 한 번쯤은 했을지도 모른다. 팍팍한 현실 앞에서 마음 놓고 투정 부릴 수 없었던 엄마를 떠올리며, 또 그런 나를 떠올려 본다. 그리고 나와 같은 무수한 사람들을 떠올려 본다. 그들과 함께 이심전심의 마음으로 서로를 쓰담쓰담하고 싶다.
내 생활 패턴으로 본다면 앞으로의 인생에서도 아마 지랄할 확률은 그리 높지 않을 것이다. 인생 지랄 총량의 법칙을 수행할 어느 때가 온다 하더라도 50년 인생의 내공으로 보다 굳건히 버틸 것이다. 다만 그런 나를 답답하다 아니하고, 바보 같다 아니하며 온전히 받아들이겠다. 그냥 그것이 나려니 하는 마음으로 어떠한 해석도 없이, 아쉬움 없이 품어 안으려 한다. 못나도 잘나도 그게 나인 것을 이미 알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