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나에게 보내는 위로

내가 챙겨야할 가장 중한 사람은 바로 나!

by 도시락 한방현숙

올해도 마지막 계절이 깊어지고 있다. 해가 더해지는 것에 무감각해진 지 이미 오래되었으나 단풍과 달빛과 낙엽에 무심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선뜻한 밤공기가 나를 감싸고, 바스락 거리는 낙엽이 나의 시선을 모으고, 붉은빛 풍경 속에 달빛마저 아스라이 번지니 이내 마음은 말랑말랑 노래 따라 리듬을 탄다.

마음이 넓어지고 환해지며 발걸음이 가벼워지면 세상 못할 것이 없는 용기가 샘솟는다. 어제 이 일을 다시 보고, 그제 그 일을 품어낼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이 살만하다는, 세상을 믿을 수 있다는 희망이 헛되지 않음을 나 스스로에게 새기며 다시 한 발을 내딛는다.

느긋한 기분으로 한가로이 거닌다는 뜻에 꼭 맞게 산책은 나에게 힐링의 시간을 마련해 준다. 밤 산책은 어제를 살피고, 지난달을 돌아보고, 작년을 성찰하게 하더니 유년을 반추하게 만든다.

이윽고, 55살의 한현숙은 기억 곳곳의 여리고 어린 한현숙들을 불러내어 손을 잡기 시작하여 눈 마주치고, 쓰다듬고, 고개를 끄덕여 주느라 분주해진다. 어질고(賢) 맑은(淑) 이름, 맑음이에게 !

엄마와 떨어져 외갓집에서 초등학교에 입학한 오줌싸개, 맑음이(淑)에게 " 괜찮아, 엄마가 너무 보고 싶으면 밤에 오줌을 쌀 수도 있어. 엄마를 만나고 시간이 흐르면 고쳐질 거야. 엄마와 떨어져 있는데도 알아서 숙제도 잘하고, 친구들과 잘 놀고, 외사촌 동생도 잘 돌보고.... 참 기특하다, 맑음아! 이제 2학년이 되면 곧 엄마랑 같이 살 수 있어. 힘내, 맑음아!"

9살 맑음이를 첫 번째로 불러낸다. 유년의 기억은 아픔으로 가득하다. 가난과 주정과 매질과 창피함으로 얼룩덜룩한 그 시절의 '나'를 끌어내 맑게 씻기고 곱게 빗겨 등을 토닥인 후 안아준다.

결국 집을 나간 엄마를 그리워하며 아버지의 술주정에 홀로 시달리던 때, 나는 말라붙은 몸에 솔기가 다 터진 바지를 입고 있었다. 13살 검은 얼굴의 나를 불안하게 내려다본다. 부모의 손길이 소홀해진 초등생 5학년은 수학시험도, 생활습관도 점점 꼬여 모든 것이 헝클어지고 엉망이었다. 거짓말이 늘어 가던 나에게, " 힘들지? 속상하지? 네 모습이 지금 얼마나 어수선한지 혹시 아니? 그래도 잘 버티고 있네. 그 먼 학교도 잘 다니고 선생님 말씀도 잘 듣고.... 앞으로 나아질 거야. 조금만 참아, 지금도 잘하고 있어!"

집에 두고 나온 어린 나 때문에 잠을 편히 잘 수도, 밥을 쉽게 넘길 수도 없었다고 엄마는 여러 번 말씀하셨다. 맨발로 도망치듯 나온 엄마는 인천의 밤거리에서 얼마나 추웠을까? 엄마 잘못이 아님에도 부모님과 동생들 보기가 얼마나 창피하셨을까? 남매를 지키지 못한 어미로서 얼마나 속상했을까? 지금의 나보다 훨씬 젊고 어린 엄마에게 따스한 눈빛으로 손을 잡아 드린다.

모든 불화의 원인인 아버지가 정말 미웠지만 궁핍하고 찌질(지질)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것은 또 다른 고통이었다. 여전히 포악하고, 변함없이 무능한 아버지의 모습은 곧 내 모습의 근원이기에 두렵고 싫었지만 아버지에 대한 연민 또한 살아있어 마음이 저렸다. 인천행 고속버스 유리창 너머로 보이던, 딸을 배웅하는 초라한 아버지의 모습이 아직도 아픔으로 살아난다. " 맑음아, 너무 속상해하지 마! 떨어져 사는 부모 사이를 오가는 너의 마음이 아픈 것은 당연한 거야. 아버지의 어리석음을 네가 어쩌겠니? 너무 울지 말고 네 마음을 보살펴! 아버지를 미워해도 괜찮아!"

아버지로부터 그렇게 분리된 우리 세 식구는 가난에 허덕이는 힘든 삶이었지만 주정과 매질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살만 했다.( 늦은 밤, 밖에서 들리는 발자국 소리에 가슴이 두근거리고 소스라치게 놀라는 증상 아버지와 떨어져 산 지 3년이 넘었을 때까지도 사라지지 않았으니.)

밭은기침과 생활고에 시달리던 엄마, 불안한 미래에 방황하던 청춘, 오빠의 모습에 늘 아렸던 중학생 맑음이도 불러낸다. 일터에 다니는 엄마에게 (가정주부라는) 풍요로움을, 방황하는 오빠에게는 (대학생이라는) 당당함을 주고 싶은 어린 맑음이의 음을 쓰다듬는다.

언제나 크리스마스 철이면 주눅 들었던 중학생 맑음이에게도 말을 건네본다. " 친구들은 모두 돌아가며 제 집에서 한번씩 모여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는데, 우리 맑음이만 여의치 않네. 괜찮아, 그 친구들과는 앞으로 40년 이상을 만나게 되는 걸! 어른이 되면 맑음이 집에서 여러 번 웃고 떠들며 친구들과 잘 지내거든. 너무 속상해하지 말고 친구들과 잘 지내. 네가 많이 좋아하는 친구들이잖아."

10대의 맑음이를 찾아내 보니 기특하기가 그지없다. 방황 속에서도 길을 찾고 흔들림 속에서도 자존심을 지키고 꿈을 키우는, 그 어려운 일을 해낼 줄이야! 이 모든 밑바탕에 가족의 믿음과 사랑이 있어 가능했음을 안도의 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인다.

많은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되었으나 유년의 아픔은 그대로 남아 내 얼굴과 마음에 종종 상처를 드러낸다. 달빛이 푸근한 밤이나 해가 바뀌는 세밑이면 이때다 싶어 나를 쓰다듬고 안아주고 위로해준다. 그러면 정말 신기하게 나를 가장 사랑하는 이로부터 이해를 받은 듯 점점 마음이 따뜻하게 차오르며 상처가 아무는 느낌이 든다. 오늘 밤 나에게 보내는 따스한 위안으로 조금 더 말랑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된 듯하다. 작정하고 행복한 사람 근처로 나를 자꾸 몰아가는 것도 괜찮은 일이다.

나는 가장 나를 사랑하는 소중한 사람이기에 절대 무심할 수 없지 않은가! 달빛으로 나를 포근히 감싸며 마음 먹는다.

https://youtu.be/YB4IV27-i6k

바람이 부네요, 이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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