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와 남자는 가을 색 짙은 공원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필 때쯤 이 공원에 왔던 여자는 벌써 한 해가 가고 있음을 새삼스러워했고, 십여 년 전 이 공원에서 해질녘마다 뛰었던 남자는 나무가 무성해짐을 감탄하고 있었다.
공원 바닥에도, 나무 위에도……. 시선을 어디에 떨어뜨려 놓아도 온통 낙엽 투성인 가을 풍경은 그것만으로도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강아지와 산책하는 남녀가 지나갔다. 아기를 안은 젊은 엄마도 지나가고, 여러 바퀴 째 걷고 있는 노인도 지나갔다. 공원에서의 오전 10시가 익숙하지 않은 남자와 여자는……. 여자가 좋다,라고 하자 남자가 그러게, 라며 응대한다. 여느 때라면 남자와 여자는 직장에서 한창 바삐 움직이고 있었을 평일 오전이었다. 둘이 나란히 앉아 여유롭게 가을 풍경에 빠지는 호사라면 호사를 지금 누리다니. 커피 마실래,라고 남자가 다시 묻자 안 돼, 아직 1시간 남았어,라고 여자가 대답한다.
여자와 남자는 공원에 오기 전 공원 근처 식당에 있었다. 여자는 돌솥 비빔밥을, 남자는 콩나물국밥을 주문했다. 남자가 여자를 식탁에서 살뜰히 챙겨주었기에 여자는 비빔밥을 남김없이 비웠는지도 모른다. 옆 테이블에 앉은 비슷한 연배의 부부가 별다른 대화 없이 오직 뜨거운 콩나물국밥 먹는 데만 열심인 것 같아 여자는 남자가 오늘따라 더 다정하다 생각했다. 맛 집으로 소문난 식당이지만, 연신 손님들이 드나들고, 게다가 직원들의 그릇 챙기는 소리, 식탁 정리하는 소리까지 더해져 이른 아침부터 부산스러운 식당은 평소의 여자라면 연신 투덜대기만 했을 곳이었다. 여자와 남자는 식당에 오기 전 근처 병원에 있었다. 인천에서 가장 크다는 종합병원에서 여자는 피를 뽑고 있었고 남자는 채혈실 밖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 한 달간 대여섯 번 이상 병원에 들러 접수할 때마다, 검사할 때마다, 수납할 때마다 얼마나 많이 여자의 주민등록번호를 기계에 입력했는지 모른다. 여자가 오른쪽 팔 안 쪽을 누르며 나왔다. 앉아 있던 남자는 여자의 왼쪽 팔 안 쪽에도 지혈을 위한 솜 반창고가 붙여져 있는 것을 보고 고개 들어 눈으로 물었다. 여자는 얼굴을 찡그리며 두 번 주삿바늘에 찔린 것보다도 그 의료인의 불친절한 태도와 명령조 말투에 기분이 더 상한 듯 말했다. 채혈실 1번 숫자 판 아래에 앉은 남자를 가리켰다. 나머지 2번, 3번은 모두 여자였다. 두 시간 뒤 여자와 남자는 식후 혈당을 재기 위해 이곳을 재방문해야 한다. 돌솥밥과 국밥을 천천히 먹었는데도 아직 1시간이 남아있었다. 여자와 남자는 중앙공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십여 년 전 이 근처 아파트에 살았기에 낯설지 않은 곳이었다. 공원 한 바퀴를 익숙한 발걸음으로 돌고 여자와 남자는 벤치에 앉았다. 남자는 공원 먼 곳을 응시하다 여자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시선을 느끼며 공원 먼 곳을 응시하던 여자도 남자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남자의 손을 잡았다. 여전히 두툼하고 따스하던 예의 그 손이었다. 남자도 여자 손을 마주 덮어 잡았다.
꽃 같은 스물둘, 스물여섯에 만난 여자와 남자는 이제 가을이 되어 가을 속에 앉아 있었다. 황홀한 봄과 무더운 여름을 어찌 지나왔는지 새삼스레 돌아보며 서로의 얼굴을 다시 바라보았다. 여자와 남자는 줄곧 잘 지내왔다. 남자는 웬만하면 다정했고 부드러웠으며 늘 가정적이었다. 여자는 꼼꼼히 살림을 꾸리고 아이를 키우고 남자의 부모님을 따르고 좋아했다. 여자와 남자는 누가 뭐래도 서로 신뢰하는 제법 의좋은 부부라 여기며 살아왔다. 고비는 늘 여자 쪽에 있었다. 여자의 오빠가 사고를 당하고, 여자의 엄마가 불행한 삶을 마감하고 여자는 혼자가 되었다. 외로운 여자는 때때로 신경질적이었으며 과도한 자존심으로 자신을 괴롭히며 버티려 애썼다. 남자는 그런 여자가 마음에 걸렸다. 남자는 웬만하면 여자 편이 되어 여자를 웃게 하고 싶었다. 남자는 센 척하는 여자가 자주 웃을 때마다 자신 덕분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자신이 뿌듯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남자도 여자 따라 많이 웃게 되었다. 여자의 수술 예정일은 다음 주 수요일로 잡혀 있다. 여자의 신장 부신에 5cm의 혹이 발견된 것이다. 5cm라니……. 여자가 복부 CT를 찍으러 들어갈 때 남자는 많이 미안했다. 1cm, 2cm도 아니고 남자 자신이 5cm로 키우기나 한 것처럼 마음이 저리고 안타까웠다. 사전 검사인 복부 CT 하나 촬영하러 가면서도 바들바들 떨고 있는 여자가 수술대에 오를 때는 어떤 모습일지 벌써부터 큰 숨이 나왔다.남자는 여자에게 잘한다 생각했는데 여자는 혹을 키우고 있었다니 남자는 자꾸 자책을 하고 있었다. 한 달 전 여자는 격년으로 시행하는 건강검진에 응하고 있었다. 추가 검진 항목으로 신청한 복부초음파 진료에서 의사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마다, 혹은 복부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있는 손동작을 느낄 때마다 긴장하기 시작하여 의사가 마지막 복부 초음파 검사를 언제 했냐는 질문을 세 번이나 물었을 때는 이미 뭔가 어그러지고 있음을 심각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 후 보름 동안 여자와 남자는 신장암, 부신피질, 갈색 세포종, 부신 종양 등을 열심히 검색했다. 아드레날린, 카테콜아민, 코르티솔 같은 부신 호르몬의 역할도 알게 되었다. 가장 입안에 침이 마르던 순간은 CT 촬영 결과지를 들고 처음 건강검진을 받던 동네 병원으로 향하던 때였다. 여자는 급히 종이를 펼쳐 cancer라는 단어부터 찾아보았다. 남자는 어느 것 하나 익숙하지 않은 단어들의 스펠링을 연신 번역기에 입력했었다. 그날 밤이 가장 길었다. 여자는 수만 가지 잔망한 생각들로 밤새 침을 꼴깍거렸고, 남자는 여자가 새벽녘까지 뒤척이고 있다는 것을 모른 척했다. 안다는 것, 이해한다는 것…… 감히……. 당하지 않고, 그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 얼마나 가볍게 입을 놀려 왔던가? 여자는 자신의 입을 주둥이라고 칭하고 싶어졌다. 여자의 엄마는 검사실 앞에서, 수술실 앞에서 매번 춥다고 말했었다. 그럴 때마다 여자는 다정한 말투로 얼마나 추웠을지, 얼마나 떨렸을지 손을 잡으며 위로했었다. 그리고 엄마의 아픔과 고통을 이해한다며 함께 눈물을 흘렸었다. 딸로서 추호의 의심 없는 진정한 아픔의 이해라 생각했었다. 개뿔! 여자의 입에서 짧은 한숨과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천천히 도리질을 해댔다. 여자는 알았다. 여자가 직접 차가운 검사대 위에 몸을 눕히니 그때에야 비로소 여자 엄마의 말이 다가오고 있음을. 여자의 엄마가 왜 그리 춥다고 했는지 여자는 같은 자리에서 오들오들 떨어본 다음에야 수년 전 여자 엄마의 말을 이해하고 있었다. 입장 바꿔 생각해 보라는 말은 유명한 노래 가사일 뿐이었다. 해 보지 않았으면 말을 하지 말라던 유명 개그맨의 유행어가 진리였다. 상대의 입장을, 상대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말, 똑같이 경험하기 전까지는 착각일 뿐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란 말은 똑같이 당(경험)해 본 후에야 쓸 말이었다고 여자는 생각했다. 남자는 지난 몇 주간 여자에게 걱정하지 마란 말을 가장 많이 했었다. 평상시 여자가 커피를 내려달라거나 재활용 분리 배출을 말할 때도 흔히 쓰던 문장이었으나 이번에는 농담이 아니었다. 남자는 진심으로 여자가 걱정하지 말기를 바랐다. 수년 전 병마에 시달리다 돌아가신 장모님의 얼굴이 여자와 겹쳐질 때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기도 했다. 아내가 암 선고를 받고 귀가하는 날 수없이 애먼 숫자만 누르다 결국 현관에 주저앉아 버렸다는 어느 남편의 이야기도 떠올렸다. 걱정하지 마란 말은 어쩜 남자 자신에게 하는 주문일지도 몰랐다. (암은) 아닐 거야, (불치병은) 아니겠지를 수 만 번 되 뇌이며 보낸 지난 며칠이었다.
여자와 남자는 다시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다시 병원으로 가야 할 때이다. 여자는 이 아름다운 풍경을 병원 천장마다 띄워 놓으면 좋겠다 싶었다. 경하거나 중하거나, 대단하거나 사소하거나 아무튼 검사 때마다 병원 곳곳에 누워 본 천장은 너무 삭막하거나 눈이 시리거나 차가웠다. 캘리 그래피 글씨체는 바라지도 않는다. 건조한 신명조 체로라도 따스한 문구들을 천장에 박아 놓고 싶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다 잘 될 거예요. 별일 아닐 겁니다.’ 등등으로 병원 천장 마감재를 따로 주문하고 싶었다. 병원 채혈실 앞 복도는 여전히 한산했다. 안을 둘러본 여자와 남자는 1번 숫자 판 아래 아까 그 남자 의료인이 여전히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여자는 다시 얼굴을 찡그렸다, 남자는 번호표 발권 기계 앞에 바짝 붙어 있다가 삼육구 게임을 하듯이 순번을 돌린 후 1번 남자를 피할 때맞춰 버튼을 눌렀다. 여자는 1번 남자가 보란 듯이, 친절한 2번 의료인에게 팔을 맡겼다. 아주 능숙한 전문가의 손길이 여자가 아플 새도 없이 피를 뽑았다. 여자와 남자는 의기양양하게 1번 남자를 한번 흘깃 째리고는 채혈실을 당당히 걸어 나왔다. 무슨 대단한 미션을 수행한 듯 여자는 깔깔거렸다. 이럴 때는 꼭 여자가 스무 살 언저리에 있는 것 같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가을바람이 나날이 강해지고 있다. 이런 추세라면 아마 여자가 퇴원할 쯤에는 눈이 내릴지도 모른다. 여자와 남자의 마음은 이 계절처럼 다행히 단단해지고 있었다. 종양의 모양이 예쁘다는 방사선과 의사의 말, 50이 넘으면 때마다 종양 하나씩은 떼어 내야 한다는 웃프기 짝이 없는 어느 지인의 농담, 나도 부신 없는 남자예요. 나는 쓸개 없는 여자인걸요. 라며 위로해 주던 후배들의 말, 호르몬 수치가 정상이라는 내분비과 의사의 말, 갈색 세포종은 아닐 거라는 마취과 의사의 말말말들이 여자와 남자를 차분하게 진정시켜 주었다. 며칠 전 여자의 생일이었다. 남자는 진심으로 여자의 생일을 축하해 주었다. 여자는 오늘부터 진짜 생일이라며 기꺼이 감사한 마음을 가득 담았다. 남자는 여자의 목과 어깨를 따뜻하게 감싸 줄 스카프를 선물했다. 스카프 곳곳에 지난번 벤치에서 맞이한 가을 풍경이 담겨 있다고 여자는 생각했다. 목과 어깨에 하나씩 스카프를 두르고 거실로 나온 여자는 춤을 추며 남자에게 다가갔다. 남자는 여자를 기꺼이 맞아 거실 바닥을 함께 밟았다. 여자와 남자는 서로 꼭 안았다. 어디선가 김광석의 노래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인생은 그렇게 흘러 여기까지 왔는데~~) 이 가을을 잘 견뎌내겠다고 여자는 생각했다. 봄에 만난 여자가 어느덧 30년 세월을 지나 가을 여자가 되었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여자와 남자는 가을 나무가 되어 겨울 숲 속까지 꿋꿋하게 걸어가기로 했다. 나목이 되어 앙상한 잎사귀 한 장마저 없이 떨고 있을 때, 무성한 계절을 보여주는 서로의 증인이 되기로 했다. 여자와 남자가 딛고 있는 거실에는 어느덧 단풍잎이 내리고 있었고둘은 가을 여자, 가을 남자가 되어 마주하고 있었다.